아들에게 제 직업을 물려주고픈 사람

by 김대일

그와는 공통점이 많다. 동갑에 학교만 다른 ROTC 출신, 한동안 보험회사 주변을 어슬렁댔고 지하철 2호선 장산 역 반경 일 킬로미터 안에서 살고 있는 해운대 구민인 점이 그렇다. 장산 역 주변 돼지국밥집에서 이 년 만에 재회했으면 반가운 김에 저녁 식사 겸 반주를 기울일 법도 한데 그는 냉큼 금주를 선언했다. 다음 날 조기 출근을 이유로 고사했지만, 격조했어도 만나면 금방 허물이 없어질 만한 돈독한 사이는 아니라고 못을 박는 선언처럼 들렸다.

후딱 밥을 먹고 들른 커피숍에서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십칠 년 동안 활동한 외국계 생명보험회사 보험설계사는 작년에 작파하고 사 년 전부터 발을 담갔던 건설 일용직 파견업체(직업소개소) 운영에 매진 중이라고 했다. 좋아질 거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경기가 특히 작년부터는 더 심상치 않더니 역병이 돈 이후로는 치명적이라며 엄살을 떨어댔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절망적인 처지에 놓여 있다면서 그냥 아는 사람과 그것도 불금 저녁에 만나 한가로이 돼지국밥을 떠먹을 정신머리는 따로 있는 겐가 의문이 들자 밑지고 판다는 새빨간 거짓말이 떠오르면서 그새 장사꾼이 다 됐구나 싶었다. 문득 ‘스마트 팩토리’라는 낯선 단어를 꺼내 들고 새로운 대안 어쩌구저쩌구 들먹거리는 걸로 봐서는 다른 뭔가를 도모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우연한 계기로 보험 영업 바닥에서 안면을 트고 알고 지낸 지 십 년이 넘었다. 서로 지척에 살면서 아주 가끔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곤 한다. 그는 점잖고 신중한 사람이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힘은 상대방을 정중하게 대해줌으로써 가능하다.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은 아주 막 나가지 못하고 덩달아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시동이 걸린 그가 취중진담을 늘어놓을 때면 대화의 격조니 품위 따위와는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일단 그는 야무지다. 품은 야망이 크고 당장의 작은 이익에 안분지족하지 않는다. 흉중에 품은 생각을 특유의 저음으로 풀어내면 마치 원대한 사업가의 사업 청사진 브리핑처럼 들린다. 그래서 나는 그가 외유내강한 사람이라고 본다. 가까이서 보면 듬직한데 간혹 마주 보는 사람을 간 보는 듯해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지만.

먹고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사람들을 관찰해 본 뒤 내린 결론이라면서 술도 안 마셨으면서 그날따라 분위기를 진지하게 깔았다. 수단이 좋은 아버지 직업을 물려받은 아들일수록 대를 이어 부자로 산단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세무사면 그 아들도 세무사 시험에 합격해 아버지 사무실을 물려받는다. 그러면 아버지 거래처도 자연스레 따라오는 법이다. 똑같은 의료 종목으로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는 아들, 사업체를 상속받는 아들 따위가 엇비슷한 유형이겠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일종의 무임승차라고 볼 게 아니란다.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주제에 좋은 직업 구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훨씬 능률적이라나. 게다가 부모가 이미 멍석을 깔아놓았으니 리스크란 것도 별로 없어서 이보다 더 안전한 유산이 어디 있겠냐는 거다. 자기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게 없어서 오로지 자수성가만이 살 길이고 초등학교 일 학년이 된 외아들이 험한 세상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을 밑거름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아비 된 자의 막중한 책임이 아니겠냐고도 했다. 삶에 대한 강렬한 투쟁심과 냉철한 현실 감각. 그 전에도 익히 알고 있던 바였음에도 이번에는 웬일인지 몸서리가 쳐졌다.

또래 중년 남자들의 보편적인 고민으로 수긍할 법도 하지만 자꾸 ‘그렇게 살다가 네 인생은?’ 하고 되묻고 싶어서 혼났다. 아들에게 물려줄 게 뭐든 간에 물려줘도 될 만큼 공고해질 때까지 그는 앞으로 또 얼마나 애면글면할 텐가. 여전히 새벽 5시 반부터 근 12시간을 꼬박 일하고 온갖 스트레스를 견디면서 4년을 버틴 지금의 직업소개소가 이러할진대 말이다.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따로 있지만 그걸 느긋하게 누릴 의미 있는 위치가 될 때까지는 유보해야 한다는 항변은 아이러니하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겠다는 뜻인 줄은 알아들었다. 한데 허튼짓을 해도 편할 수 있는 그 ‘의미 있는 위치'라는 게 과연 어느 만큼인지 선명하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쾌재를 불렀다고 치자. 부른 배를 땅땅 치면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그대로 멈춰 세울 수가 있을까. 입신을 위한 끝없는 갈망 때문에 정작 한 줌도 안 되는 여생마저 소진되는 건 아닌지 나는 속으로 계속 묻고 또 물었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귀갓길은 그래서 수상愁傷했다.


변함없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인생은 없다. 지향하던 목표가 도중에 꺾이고 다시 꺾이어 변형된 뜻밖의 결과가 나의 현재다.

- 박동환, 『X의 존재론』, 사월의책 中


keyword
작가의 이전글중심에 서 있어야 할 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