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시바 May 21. 2020

생각은 진화한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의 인지적 특성을 자극하는 생각이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온다고 해서 그것이 원형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고 100%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엄밀한 수학적 수치나 과학적 이론이라면 내가 받아들인 원형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형태를 띤 생각은 우리의 머릿속에 저장되고 꺼내지는 과정에서 우리가 더 기억하기 쉽게, 더 꺼내어 설명하기 쉽게 다듬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도하여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뇌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해치우는 일입니다. 


약 80년 전 초기 스키마(Schema, 우리 머릿속에 쌓이는 지식의 구조) 개념을 처음 제안한 영국의 심리학자 프레데릭 바틀릿(Frederic C. Bartlett)은 학생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놀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받아들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대학생들에게 동양 문화권의 이야기를 읽게 한 후, 그것을 단순한 기억만으로 다른 학생에게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관찰해본 결과 이야기가 여러 사람들을 거쳐서 전달될수록 체계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자신이 이미 갖고 있던 개념이나 정보에 맞춰 새로운 정보를 저장합니다. 그리고 혹여나 정보나 이야기에 구멍이 난 부분이나 논리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있을 경우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갖고 있던 기존 정보를 이용하여 구멍 난 부분을 메우거나, 아니면 아예 이야기를 자신에게 익숙한 형태로 변형하여 저장합니다. 


예를 들어, 서양의 학생들이 이야기를 전하는 과정에서 동양적 성격의 캐릭터들은 서양의 관점에 맞춰 변화했습니다. 학생들은 동양적 성격의 캐릭터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될 때는 자신만의 의견을 덧붙여 설명하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익숙한 유형의 캐릭터로 변경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전하는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항상 원작에는 없는 표현인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났는데, 이는 보통 우리가 접하던 이야기나 동화 등이 모두 이런 식으로 끝나기 때문으로 추측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일상에서도 아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머님께 겪었던 일화를 말씀드린다면, 그것은 금세 친척들 사이에 퍼져나갈 것이고, 나중에는 아주 먼 친척이나 나를 모르는 친척의 지인들에게까지도 제 소식이 퍼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제 일화 중 많은 부분들은 변형되고 삭제되어 사람들이 관심 있어하는 핵심적인 부분만이, 사람들이 원하는 형태로 (주로 자극적으로) 편집되어 전달될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어느 날 제가 만약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국산차보다 더 저렴한 가격에 독일산 외제차 중고를 인수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가족 모임에 이 차를 끌고 나가는 순간 제가 외제차를 끌고 나왔다는 소식은 금세 널리 퍼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널리 퍼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듣고 싶은 형태로 변형되어 'OO기업은 요즘 잘 나가서 과장도 외제차 타고 다닌다더라', '내 주변에 아는 사람이 요새 주식으로 한몫 잡아서 외제차 뽑았다더라' 하는 식으로 전달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퍼지는 과정에서 그 생각을 퍼뜨리는 사람에 의해 변이를 일으킵니다. 그 변이는 단순히 한 가지 방향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변이가 발생할 것입니다. 같은 소식이어도 A라는 사람이 받아서 전달할 때와 B라는 사람이 받아서 전달할 때 서로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가지 형태로 변이 된 생각들 중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생각의 핵심만이 살아남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게 됩니다. 생각이 널리 퍼지는 과정에서 일종의 자연선택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이미 지난 글들에서 몇 차례 설명했듯이 유전체(이 경우에는 우리의 생각이 유전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와 변이, 그리고 자연선택이라는 세 가지 조건은 바로 '진화 프로세스'의 필요충분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우리의 유전자와 같이 실체가 보이지 않지만 마치 우리의 유전체가 진화하며 퍼지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런 생각의 특징을 발견한 사람들은 우리의 생각 또한 유전자(Gene)와 같이 생각만의 유전체가 있다는 개념을 발전시켜 이것을 밈(Meme)이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본 글은 밈에 대해 설명하는 글은 아니므로 밈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자세히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것은 생각은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과정에서 더 끈끈한, 더 기억에 잘 남을만한, 더 흥미로운 형태로 변이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전 07화 잘 전파되는 생각에는 어떤 특성이 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