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편지
이곳 아프리카에서 살면서 아빠가 '가장' 힘든 건, 어쩌면 사실 더위도 아니고 불편한 생활도 아니야. 바로 끊임없이 마주하는 거짓말의 향연이야.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일상이고, 아빠가 외국인이라고 원래 가격에서 몇 배로 뻥튀기하는 상인들, 분명 고치지 않았으면서 “다 고쳤다”라고 태연히 말하기도 하고, 길을 모르면서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처음엔 그 모든 게 이해되지 않았어.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거짓말 때문에 정말 뒷목을 잡을 것 같은 날도 있었는데..
큰맘 먹고 첫 중고차를 구입했던 날, 차고 같은 게 없었으니까 길가에 주차를 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차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우리 차를 지켜준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나타났어. 덩치가 크고 인상도 험상궂은 사람이었는데, 이 동네 차들을 다 관리한다고 하더라. 혹시나 싶어 집주인에게 물어봤더니, “맞아요, 그 사람이 여기 차들 다 보호해 줘요” 하길래 그 말을 믿었지. (물론 그 말도 나중에 거짓말이었어.)
그래서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어. “그럼 한 달에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이리저리 이야기를 나눈 끝에, 결국 한 달에 2천 원(세네갈 화폐는 세파 cfa : 이해가 쉽도록 원화로 표기)으로 합의했지.
그런데 한 달 뒤, 약속한 돈을 건네려던 날 문제가 터졌어. 그 사람이 갑자기 “우린 만원으로 이야기 얘기했잖아요?” 하는 거야. 순간 귀를 의심했어. 분명히 2천 원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만원이라니. 내가 당황해서 “아니요, 2천 원이었잖아요” 말하자, 그는 “아니요, 당신이 ‘디밀(만원)’이라고 했어요” 하며 주변 사람들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눈빛을 교환하더라고.
알고 보니 현지 말로 2천 원을 ‘드밀’, 만원을 ‘디밀’이라고 하는데, 그걸 빌미로 장난을 친 거야. 분명히 아빠가 손가락으로 2를 표시하며 말했었고 종이에 써주기까지 했는데.. 써서 '준 게' 아빠의 실수였지. 아빠가 가지고 있는 계약 증거가 없었으니까. 너무나 당당하게 내 앞에서 히죽거리며 웃는 그 사람의 얼굴이 오랫동안 아빠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 결국 어떻게 잘 합의가 되긴 했지만, 그날 이후로 아빠는 현지 사람들과 어떤 약속을 하든 꼭 글로 남기는 습관이 생겼어.
또 언젠가는, 집에 놀러 왔던 현지인 친구의 동생이 엄마의 귀걸이를 훔치려다 들킨 사건도 있었지. 그 사람은 끝까지 결백하다고 주장했어. 오히려 화를 내며 “왜 나를 의심하냐”라고 목소리를 높이더라. 귀걸이가 그 사람 품에서 나온 다음에도 말이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이 사람들의 문화가 이해가 되더라고. 이 나라 사람들은 ‘수치’를 참지 못해. 틀렸다고 인정하는 일, 모른다고 말하는 일, 못했다고 솔직히 시인하는 일이 그들에게는 존엄을 잃는 일과도 같거든. 그래서 누가 봐도 아닌데도, 끝까지 부정하고, 아무렇지 않게 거짓을 말해. 거짓말인 줄 서로 다 알면서도, 그들은 체면을 지키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거야.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빠는 생각했어. ‘이곳에서 자라는 너희는 어떨까?’ 거짓이 너무 자연스러운 세상에서 정직이란 가치를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진실하게 산다는 게 혹시 손해로 느껴지지는 않을까. 그 걱정이 마음 한구석에서 오래 머물렀어.
그런데 말이야, 정말 가끔이지만, 이곳에서도 정직한 사람을 만날 때가 있잖아. 너희도 알지? 그 순간의 기쁨이란, 마치 끝없는 사막 한가운데서 맑은 샘물을 발견한 듯한 감동을 주곤 해.
그 사람이 “이건 제가 모르는 거예요.”라고 솔직히 말할 때, “제가 실수했네요.”라고 인정할 때, 혹은 “미안해요.”라며 진심으로 사과할 때, 그 짧은 한마디들이 얼마나 큰 울림이 되는지 너희도 함께 봐서 알지? 그때마다 아빠 마음이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어. 그리고 그 믿음은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단단하게 묶어주는 끈이 되었지.
그래서 아빠는 지금도 그 정직한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잖아. N 이모가 그렇고, P 아저씨도, J 삼촌도.. 그들이 보여준 성실함과 진심 덕분에, 우리는 이 낯선 땅에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들을 누리곤 하지.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빠는 뜨거운 이곳에서 버틸 힘을 얻고, 위로를 얻어.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 그들을 통해 배울 때도 있어.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아빠는 확실히 알게 되었어.
정직함이 결국 삶을 단단하게 세워준다는 걸 말이야.
아빠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봐.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마치 한 채의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매일매일 하는 선택들,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다 벽돌이 되어 쌓여가는 거지. (아! 아기 돼지 삼 형제를 떠올려보면 좋겠다.)
거짓말로 쌓은 집은 언뜻 보기엔 번듯해 보일 수 있어. 빨리 지을 수도 있고, 남들 눈에 그럴듯해 보이게 만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집은 언젠가 반드시 무너져.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금방 실체가 드러나기 마련이야.
반면에 정직으로 쌓은 집은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어. 느리고, 때론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집은 튼튼해. 세월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아. 게다가 그 집은 주변 사람들이 기꺼이 찾아와 머물고 싶어지는 안정감을 제공하지.
너희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도 아마 쉽지만은 않을 거야. 거짓이 통하는 순간들도 분명 있을 거고, 정직하게 살다가 바보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거야. 하지만 아빠는 너희가 그런 순간에도 이걸 기억했으면 좋겠어. 네가 지금 쌓고 있는 건, 단순히 오늘 하루가 아니라 평생 살아갈 집이라는 걸. 그리고 그 집은 언젠가 너의 아이들에게도,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안식처가 되어줄 거라는 걸.
아빠는 너희가 어디서 살든, 무엇을 하든, 정직이라는 재료로 삶을 쌓아가는 사람이 되길 바라. 그게 결국, 너희 스스로를 지켜주는 가장 단단한 울타리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