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 편지
몇 달 전, 이 편지를 꼭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날,
아빠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어.
‘과연 내가.. 이 글을 쓸 자격이 있을까?’
그 질문이 오래도록 아빠의 마음 한구석에 머물렀어.
사실 돌이켜보면, 아빠는 그렇게 늘 다정한 사람만은 아니잖아. 남편으로, 아빠로 살아가면서 따뜻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거든. 아프리카의 햇빛 아래에서,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때로는 아빠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 단단함이 어느 날은, 차가움이 되어버릴 때도 있었으니까.
아프리카에 와서 살다 보니, 정전과 단수가 일상이 되어버린 날들이 이어졌어. 낯선 땅에서 버텨야 하는 매일은 생각보다 길고, 고단했지. 사람들과의 언어도, 마음도 쉽게 닿지 않아서 소통의 벽 앞에서 무력해질 때가 많았어. 그 답답함과 피로가 조금씩 마음 구석에 쌓여가던 어느 날. 바깥의 열기와 짜증을 그대로 안고 집에 돌아와 씻으려 하는데, 거실 가득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퍼졌어.
와장창!
순간, 집 안의 공기가 멎었고 너희의 웃음소리도 함께 사라졌지. 그 현장을 바라보던 아빠는, 그동안 참아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지며, 결국 너희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내고 말았어.
그날 아빠의 목소리는 아프리카의 태양보다 더 뜨겁고, 더 거칠었을 거야. 너희는 얼마나 놀랐을까. 아빠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무엇이 그토록 큰일이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지. 아빠는 지금도 그날 너희의 얼굴을 기억해. 순식간에 사라진 웃음, 작아진 어깨, 겁먹은 눈빛들. 그 표정들이 마음 한켠에 깊은 흔적처럼 남아 있어.
물론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은 아니었어. 그 후로도 아빠는 몇 번이나 또 화를 냈지. 돌이켜보면, 그때마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미안하고, 또 부끄럽다.
부모가 된다는 건 비로소 완성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다시 배우는 사람으로 돌아가는 일인 것 같아. 너희를 가르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결국은 아빠도 배우는 날이 더 많았지. 너희 덕분에 사랑을 배우고, 기다림을 배우고, 때로는 내 안의 미숙함과 마주하는 법을 배우고 있어.
아빠는 언제나 너희에게 든든한 나무가 되어주고 싶었어. 그늘을 내어주고, 비바람을 막아주는 그런 존재 말이야. 하지만 현실의 아빠는, 바람 한 번에도 쉽게 흔들리고 넘어지곤 했지. 그럴 때마다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어. 그래서 아빠는 마음속으로 자주 되뇌었어.
“나는 언제쯤 완벽한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다행(?)인 건, 육아 고수로 불리는 오은영 박사님도 자녀를 키운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오 박사는 “지금 대학생인 아들 한 명이 있는데 나와 관계가 가깝다”며 “얘기도 많이 하고 시간도 많이 보내 친한 편”이라고 말했다.. (중략).. “저 또한 사람이고 (아이 때문에) 화가 날 때도 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되도록 제가 방송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이를 대하려고 애를 썼다”라고 덧붙였다.
-21년 10월 11일 조선일보 기사 발췌-
이 기사를 읽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더라. 아, 오은영 박사님도 화가 날 때가 있었구나. 애쓰며 버텼구나. 그 사실이 어쩐지 큰 위로가 되었어. 하하;
이번 편지를 쓰면서, 아빠가 너희에게 했던 지난 실수들이 자꾸 떠올라서, 옆에 있던 엄마에게 슬쩍 물어봤지.
“내가 많이 부족하지?”
그랬더니 엄마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라고.
“당신 정도면 꽤 괜찮은 아빠죠. 지금 아이들이 증명해 주잖아요. 아이들이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고 따르는지, 당신도 알잖아요. 물론 누구나 실수할 수 있어요. 나도 실수하잖아요. 단지 그 실수를 빨리 바로잡고,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다시 이어가면 되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데, 아빠 마음이 조용히 따뜻해졌어.
아빠는 늘 마음속에 하나의 다짐을 새기고 있어. ‘미안하다’는 말을 두려워하지 말자. 사실 예전엔 그 말이 참 어려웠던 거 같아. 왠지 그 한마디가 아빠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것 같았거든.
하지만 이제는 알아.
‘미안하다’는 말은 부끄러움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걸.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잘못한 순간을 인정할 줄 알고, 먼저 손을 내밀 줄 알아야 해. 그래야 잠시 멀어졌던 마음의 거리가 금세 다시 이어질 수 있으니까. 너무 오래 머뭇거리면, 그만큼 돌아가는 길도 멀어지고 말 거야. 그래서 아빠는 이제 알 것 같아. 그 거리를 좁히는 건, 시간이 아니라 ‘용기’라는 걸.
아빠가 여전히 부족하고, 앞으로도 또 부족할 수 있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꼭 알아줬으면 해. 아빠는 언제나 너희가 편하게 기대 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불안보다 따뜻함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 언제든 다가와 아빠의 턱을 간지럽힐 수 있는 판다 인형 같은 아빠 말이야.
그리고 언젠가, 너희도 부모가 될 날이 오겠지. 그때 너희 역시 오늘의 아빠처럼 서툴고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게 될지도 몰라. 혹시, 그런 날이 오면, 이 편지를 다시 꺼내 읽어줬으면 해.
“아, 우리 아빠도 이랬구나. 그때 아빠는 어떻게 했더라?”
아빠의 서툰 모습이 너희에게 그런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부족했던 이 편지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거야. 사랑은 완벽함에서 자라는 게 아닌 거 같아. 넘어져도 부딪혀도 다시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라는 터에서 더 단단하게 자란다는 걸, 언제나 잊지 않는 너희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