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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이 순간.

열세 번째 편지

by 나귀

뜨거운 냄비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초저녁의 노을빛이 부엌 창가로 스며들던 평범한 어느 저녁, 엄마가 첫째에게 조용히 질문을 건넸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 하면, 어떤 게 떠올라?”


엄마는 내심 너의 대답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을 했었대. 어느 멋진 여행지에서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지 않을까, 아니면 오랫동안 갖고 싶어 하던 선물을 뜯던 짜릿한 순간을 말할까. 아니면 잠시 한국에 갔을 때의 반가운 추억을 꺼내놓을까. 여러 장면들을 떠올리며 엄마는 조용히 첫째의 대답을 기다렸어.


“음... 가장 행복했던 순간?”


첫째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대.


“아, 맞다. 우리 아프리카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있잖아. 말린 살구를 가지고 동생이랑 포크레인 장난감으로 놀던 그때. 그 살구를 포크레인 위에 얹어서 옮기기도 하고, 실에 매달아서 끌어올리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 그리고 그때 건너편 집 세네갈 애랑 처음 인사도 했었어.”


그저 말린 살구와 웃음뿐이었는데, 그 짧은 순간이 너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남았다니..




그 이야기를 듣고 문득 생각해 봤어. 누군가 아빠에게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라고 묻는다면 어떨까. 그 질문에 잠시 고민해 봤는데, 아마 아빠도 이런 대답을 할 것 같아.


“아이들이 처음으로 ‘압~빠빠’ 하고 아빠를 불렀던.. 그때요.”


그 짧고 어눌한 발음 속엔 세상 그 어떤 말과도 바꿀 수 없는 완전한 행복이 있었거든. 처음으로 ‘아빠’라는 이름을 부르며 너희가 내게 다가오던 순간, 그 한마디가 아빠의 마음을 통째로 녹여버렸지. 너희가 아빠를 인식하고, 찾고, 부르고, 그 작은 손으로 아빠 품에 안기려던 그 순간 말이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행복을 먼 곳에서 찾으려 애쓰는 것 같아. 여기보다 더 좋은 곳, 지금보다 더 특별한 경험, 가진 것보다 더 값진 선물.. 그런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라 믿으며 달려가곤 하지. 그런데 너희의 대답이 잔잔하게 아빠 마음을 울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더라.




행복은 무언가를 ‘더 얻는’ 데 있지 않고,
이미 ‘있는’ 것을 온전히 느끼는 데 있다고.




작지만 소소한 곳에,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행복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거지. 우리가 밥을 함께 먹으며 맛있다~라고 말할 때, 누군가 엉뚱한 유머를 던져서 함께 웃음이 터질 때, 또 누군가 이상한 춤을 추느라 깔깔 거리며 배꼽을 잡을 때.. 그 모든 순간에 행복이 있었는데, 너무 멀리 보느라 우리가 그냥 지나쳤던 거야.








우리는 대부분 미래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살아가. 내일을 위해, 다음 달을 위해, 몇 년 후를 위해 말이야. 물론 그건 중요한 일이야. 하지만 그러다 보면 때로는 정작 ‘지금’을 놓치게 되는 것 같아.


아빠는 너희가 너무 멀리 있는 미래를 바라보다가 지금 이 소중한 순간을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길,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함께하는 이 시간에 마음을 다해 서로 사랑하길 바래.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서툴러도 좋아. 그저 지금, 여기.. 온전히 함께 있는 이 시간을, 순간을 사랑하는 것. 그 안에 우리가 찾던 행복이 다 들어 있으니까.




언젠가 너희도 어른이 되면, 해야 할 일들이 쌓이고, 책임이 무거워지는 날이 올 거야,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날, 조용히 그런 생각이 스칠지 모르겠어.


“그때가 진짜 행복했는데..”


아빠가 추측하건대, 여기서 ‘그때’는 대단한 날이 아닐 거야. 그저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고, 따뜻한 밥 냄새가 식탁 위에 퍼지고,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아빠, 엄마” 하고 불렀던 평범한 하루일 거야. 그런 지극히 평범한.. 이 순간이 언젠가 너희 마음속에서 가장 찬란한 기억으로 반짝이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오늘을. 지금을. 이 순간을. 사랑하는 너희가 되면 좋겠어.



우리가 함께 웃을 수 있는,

소중한 이 시간을 말이야.



지금 이 순간 너희를 가장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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