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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식 Apr 26. 2022

노란 프리지아와 빨간 장미와 하얀 안개 꽃다발 2

20220426 세가지 이야기 중 두번째 이야기

관리사무소에 들어서자 오른쪽 벽을 가득 메운, 전에는 없었던 수많은 모니터가 아파트 곳곳을 비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전입신고를 하는 듯한 젊은 부부가 비말차단용 투명 플라스틱 벽이 세워져 있는 데스크 넘어 직원에게 주차등록 시스템에 대한 안내를 듣고 있었고 나는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몰라 그냥 앞에 있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저, 주차장에서 누가 제 차를 긁고 그냥 갔는데, 씨씨티비 확인을 좀 하고 싶어서요.     


젊은 부부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봤다.

환영해요.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투명 플라스틱 벽이 세워진 기다란 데스크 앞에 나란히 놓인 자리가 아닌, 사무실 뒤쪽 커다란 단독 책상에 앉아 있던, 아마도 관리소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왔다. 이런 일 한두 번이 아닌 듯 능숙하게, 요청하는 사람의 마음이 너무 상하지도 편의를 봐줄 거라는 기대를 하지도 않게, 관리소장님(아마도)은 우리도 보여주고 싶지만 개인 정보 때문에 법이 바뀌어서 먼저 경찰서에 뺑소니로 신고를 하고 공문을 가지고 오면 경찰 입회 하에만 씨씨티비 열람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얘기를 들으며 내 맞은편에 있던 직원이 요즘에도 이런 걸 쓰나 싶은, 검정색 하드커버를 앞뒤로 대서 종이 위쪽을 펀치로 뚫어 끈으로 묶은 서류철을 꺼내 경찰서 공문 더미를 주르륵 넘기며 보여주었다. 이것 봐, 한두 건이 아니고 모두 절차대로 하고 있어. 그러니까 군소리하지 마. 라는 무언의 압박.     


경찰서, 신고, 뺑소니, 공문.

어느 하나 편치 않은 단어들을 모아 문장으로 듣고 나니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지?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하는 생각과 함께 전에 없던 전투력이 상승했다. 잡고 만다.     


경찰서에 신고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태어나서 처음 경찰서에 갔던 건, 이십 대 중반에 종로 맥도날드에서 새로 산 지 얼마 안 된 지갑을 도난당했을 때였다. 지금의 남편, 그때엔 남자친구와 같이 있었는데 갑자기 핸드폰에 15만원씩 현금서비스를 인출 하는 문자가 연달아 쏟아졌다. 그제야 지갑이 없어진 걸 알았고 경찰에 신고했다. (못 잡았고 카드회사에서 도난 인정을 해주지 않아서 내가 다 갚았다)


두 번째는 명동 우리은행 ATM기에서 통장을 주웠을 때였다. 바로 근처 경찰서에 방문해서 습득물 등록 같은 걸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세 번째가 될 이번 주차장 뺑소니 사건. 지금부터 썰푼다.     


먼저 관리소장님이 알려주신 대로 112에 전화를 걸어서 뺑소니 신고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무언가 경찰에 신고하려면 112에 전화를 하면 된다.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해보지 않아 진짜인지 궁금할 수 있으므로 굳이 알려 드린다. 그냥 무작정 112에 전화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뒷일은 알아서 해주신다.

곧 근처 지구대에서 사건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문자가 왔고 경찰관 두 분이 도착하였다. 나는 잘못한 것도 없이 떨리는 마음으로 사건 발생 예상 시간과 주차 위치, 발견했을 당시의 상황 등의 질문에 성실하고 솔직하게 대답하였고(내가 피해자다) 그분들은 사건 경위를 확인하고 내 차 상태를 확인하고는 다른 어떤 조치 없이, 관할구 경찰서의 뺑반(뺑소니 전담반)에 직접 방문해서 조서를 쓰고 신고하라고 안내해주었다. 필요하시다면 경찰차로 서까지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라는 말을 덧붙이며.     


다시 신고. 이번엔 직접 방문. 조서 작성.     


 시간을 확인했다. 열한시가 조금 넘은 시각. 경찰서까지는 십 분 거리고 장례식장까지는 한 시간 거리다. 친구랑 장례식장에서 한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경찰서에서 너무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 들렀다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빨리 해치우자.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오래 걸릴 일 없겠지.


 뺑소니 당한 차를 타고 경찰서에 도착해서 민원인 주차장에 주차하고 민원실에서 체온 체크, 연락처 기재 등을 한 뒤 건물을 통과해 뒤에 있는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큰 사무실 안에 많은 책상과 사람들이 있었고 뻔한 경찰서의 풍경으로 예상할 수 있듯 큰소리를 내는 아저씨도 상대하는 경찰관도 있었다.

사무실 입구에서 잠깐 기다렸다. 경찰관 한 분이 무슨 일로 왔는지 물어보더니 일반 회사였다면 팀장님 자리에 계신 분에게 안내했다. 정확히 삼십분 전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경찰관 두 분에게 전한 얘기를 똑같이 다시 했고 그분은 큰 사무실 밖 작은 사무실에 가면 사건 신고서가 있으니 거기에 방금 했던 얘기를 적고 추가로 내 차가 주차되어있던 자리를 확인할 수 있는 씨씨티비 번호를 기재하고 종이 뒷면에 주차장에서 내 차의 주차 위치를 그림으로 그리라고 했다. 오른쪽에서 네 번째였는지 다섯 번째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진짜로 삼분 만에 조서 작성을 끝냈다.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씨씨티비 번호를 확인하느라 오분 정도 더 소요됐지만, 뒷면에 주차 위치 그림까지 십분 안에 끝냈다. 소란스러운 곳에서 기분 나쁜 일로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맞춤법이고 띄어쓰기고 비문이고 나발이고 다시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혹시나 해서 조서 쓴 것을 사진으로 찍어 남편에게 보냈다. 곧바로 글에 독기가 가득하다며 남편에게 답문이 왔다. 얘를 먼저 죽일까.     

팀장 자리에 앉아 계신 분께 조서를 제출했다. 앞뒷면을 확인하더니 날짜도 정확하고 씨씨티비 번호도 있으니 금방 잡을 수 있겠다며 담당 경찰관이 배정되면 전화가 갈 거라고 했다.      


차에 앉아 네비게이션에 장례식장 이름을 검색했다.

예상 소요 시간 56분. 안내 버튼을 누르고 음악 스트리밍 앱을 열어 랜덤 플레이 재생을 했다.    

 

친구보다 십분 먼저 도착해서 커피를 주문하는데 담당 경찰관에게 전화가 왔다. 발음이 너무 성의 없어서 처음엔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다. 네? 어디시라고요? 두 번이나 물어보고 나서야 담당 경찰관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주를 확인하느라 한 번, 사고 시간을 확인하느라 한 번, 못 잡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통보하느라 한 번, 관리사무소 공문 시스템을 확인하느라 한 번, 자꾸 전화해서 죄송하다면서 담당 경찰은 친구가 도착하기 전까지 네 번이나 전화를 했다. 언제 끝나는 걸까.     


친구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검정 원피스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우리 둘 다 애가 열 살인데, 어른이 된 지 한참인데, 새카만 옷을 입고 이런 곳에서 마주하는 일은 영 자연스러워 지지가 않는다.


장례식장 건물에 들어서며 ATM기에서 내 몫과 부탁받은 친구 몫의 부조금을 찾았다. 이것 또한 어른의 일.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날이 흐려서인지 장례식장까지 운전해서 오는 동안 랜덤플레이로 재생시켜놓은 핸드폰에서 줄곧 차분한 곡들이 나왔고 덕분에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다 슬펐다고 생각했는데, 상복을 입고 걸어 나오는 친구를 보고는 담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뺑소니범을 잡았다는 경찰관의 연락 대신 대학 동기의 부고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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