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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식 May 13. 2022

주문 같은 말

누구라도 좋아할 사람이 필요했던 시절.



중학교 때 유행하던 놀이가 있다.     


40문 40답.     


당시 패션, 연예 잡지에는 연예인들이 인터뷰 형식으로 하는 백문백답이 유행이었다.

우리는 예쁜 공책을 한 권 골라 맨 앞 페이지에 100가지의 질문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그중 알짜만 추려 40가지 질문을 적고 그 질문에 답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인터뷰이로 지목당한 사람은 해당 질문의 번호와 함께 답을 적었는데, 자신의 사진을 붙여서 주기도 하고 글씨 크기를 다르게 적고 색을 바꿔가며 포인트를 주기도 했다. 사인을 하기도 했는데 나름 편집디자인 요소를 수작업으로 가미한 페이지에서는 그럴싸하게 잡지 느낌이 났다.


40문 40답의 시작은 이랬다.     


1. 이름

2. 키, 몸무게

3. 가족

4. 집주소

5. 생년월일     


타인에 대한 배려 따위 없는 호구조사로 시작한 40여 가지의 질문은 본인의 성격, 좋아하는 과목, 음악, 감명 깊게 본 책이나 영화  등의 가벼운 설문을 거쳐 성적, 잠버릇, 집에서 쉴 때 하는 일, 노래방 애창곡 등의 TMI 물음을 지났고 이상형,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 좌우명, 사는 이유, 10년 뒤 자신의 모습은? 등의 심도 있는 문항을 통해 평균 십오 년을 산 여중생들에게 골몰할만한 고민을 안겨주었으며, "이 공책 주인에게 하고 싶은 말은?"이라는 인터뷰어의 자기애 가득한 질문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공책의 첫 장을 누가 쓰냐에 따라 공책 주인의 가장 친한 친구 혹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는데, 성격에 따라 그냥 1 분단 첫 번째부터 뒤로 옆으로 넘겨 가며 써서 공책 주인이 반 친구들과 얼마나 두루 친한지 짐작할 수 있기도, 페이지가 뒤로 넘어갈수록 학교와 학년, 반을 얼마나 넘나드나를 보며 인싸력을 확인해보기도 했다. 공책을 받은 사람은 앞에 누가 뭐라고 썼는지 보는 것도 재미 중 하나였다.


내 공책의 첫 장은 H언니가 쓴 것으로 확인되었다. 큰 키에 하얀 피부, 짧은 커트 머리에 아침마다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던 그 언니는 여중 여고가 한 울타리 안에 감싸져 언덕 위에 올려진 높고 넓은 사립 여학교의 인기 스타였다.


평균 15세의 우리는 사랑이 궁금했고 마음이 넘쳤고 실컷 표현하고 싶었다. 우정과 사랑이 혼재하고 성별을 초월하고 우상을 만들어 친구들과 앉은자리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불을 지핀 건 우리 학교에 있던 '꿈다모아'라는 교내 우체국이었다. 학생들끼리 우정을 도모하라고 만든 펜팔 문화가 팬레터 문화가 될 거라고 선생님들은 미처 생각지 못하셨으리라.

우린 옆에 앉은 친구한테도 편지를 썼고 동경하는 선배 언니한테도 편지를 썼다.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에 편지 배달이 오면 누가 누구에게 몇 통의 편지를 받는지 주시하고 몰려가서 내용을 궁금해했다. H언니는 자주 많은 편지를 받았다. 내 편지는 묻히기 일쑤였고 나의 편지 쓰기 실력은 아마도 이때에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이후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선물을 받는 데에 혁혁한 공이 된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친구를 좋아했고 서태지를 사랑했고 H언니를 동경했다.


친구들과 앉아서 각자 멋있다고 생각한 선배 언니에 대해 얘기하고 그 언니가 어디 복도에서 누구랑 얘기하고 운동장에서는 무얼 하는지, 매점에서 뭘 사 먹었는지 등을 연예인 덕질하듯 소식을 퍼 날랐다. 연예인은 너무 멀고 높이 있었고 주변에 멋있는 남학생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지만, 선배 언니는 손 닿는 곳에 있었고 눈 돌리면 볼 수 있었다. 그때의 우린 그게 그렇게 설레고 재밌었다.     


그러니 내 공책의 첫 장을 H언니에게 써달라고 하는 건 공책을 만들면서부터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언니가 알려줄 정보들이 미치게 궁금했고 H언니를 좋아하는 다른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으며, 대망의 마지막 질문에 뭐라고 쓰여 있을지를 두 손 모아 기대했다.


며칠 전에 이 글을 쓰기 위해 싸이월드 다이어리보다 더 무서운 그 공책을 열어본 나는, 열네 살의 나를 실컷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어떻게 생각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읽어 본 H언니의 답변은 성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90년대 인기스타의 전형이었던, 형식적이고 쿨한 단답식 대답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잔뜩 기대했을 게 뻔한 마지막 질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공부 열심히 해라. 잘 살아라.     


H언니는 어쩌면 우리 학교의 이효리 같은 존재였나보다.

공책을 같이 보던 나와 친구들은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말을 새겨듣진 않은 게 분명하다. '반드시'라는 강조의 표현이라거나 느낌표라도 몇 개 달려 있었으면 달랐으려나?



 손을 벗어나 한참을 떠돌다 돌아온 공책에는 여러 친구들과 언니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인기스타의 형식적인 답변도 장난으로 가득한 낙서 같은 페이지도 있었고 전교 1 언니의 철학서 같은 답변에 충격받기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친구/언니가 가진 어른스러운 모습이나 어두운 생각을   되어 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그들을 보게 되기도 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이야기를 보게 되어 놀라기도 했는데  사람은 H언니의 친구였던 J언니였다. 조용하고 책을 많이 읽었던 J언니와는 친하지 않았는데(물론 H언니와도 친하지 않았음) 공책을 정성스럽게 써준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웠던 건, 마지막 답변, '공책 주인에게 하고 싶은 '이었다.

  

어디 가든지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됐음 좋겠다.     


그 답변을 읽는 순간 갑자기, 주문에 걸린 것 같았다. 다른 말들은 모두 날아가고 흩어졌지만, 바람과 염원을 담은 그 문장만은 남아 나는 한 단어 한 단어를 꼭꼭 씹어 먹었다. 그러면 반드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좋아한다는 말보다 네가 제일 착하고 귀엽다는 말보다 나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담은 이 말은 이 날 이후 나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나는 자주 이 말을 떠올렸다. 엄마가 버거울 때, 아빠에게 실망했을 때, 남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 처음 들어간 광고 프로덕션에서 쥐똥만 한 월급을 받지 못했을 때, 친구와 싸웠을 때, 구 남친 현 남편과 좁혀지지 않는 의견 다툼을 벌인 후에, 그리고 회식 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렸다.


어디에도 내 자리는 없는 것 같고,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는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다 못해 지반을 뚫고 내려가 천연암반수와 하이파이브할 것 같을 때에도 나는 저 문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곱씹어 생각했다.


나는 살면서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바람과 순수한 응원을 받아본 적 있는 사람이야.


나는 살면서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바람과 순수한 응원을 받아본 적 있는 사람이야.


나는 살면서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바람과 순수한 응원을 받아본 적 있는 사람이야.



역설적이지만, 나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힘든 순간에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있다는 것, 그게 나에대한 이유 없는 믿음과 대가 없는 순수한 응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만으로 저 말은 모든 목적을 달성했다.


어른이 된 나는 저 문장을 광화문 교보문고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처럼 마음 한 구석에 달아 놓고 들여다볼 일이 있을 때마다 떠올리며 동시에 남발한다. 친구의 조카에게, 친구의 딸에게, 내 아이의 친구에게, 내 아이에게. 나에게 통했던 효력만큼 효험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떠한 인간관계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기를 바라는 어른의 마음으로, 그저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사랑받기를 바라는 인생 선배의 순수한 마음으로.


나의 편지를 받은 모든 소녀 혹은 소년의 앞날이 아름답기를 바란다.

어디 가서든 누구에게나 사랑받기를, 하지만 이 말에 집착하지는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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