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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Sep 24. 2022

밀라노에서의 한나절

미술 전시회, 몇 시간까지 줄 서 봤니?

토리노에서 새벽부터 기차를 잡아 타고 밀라노로 가는 길. 새벽 공기가 얼어붙을 듯 하지만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몇 년 전, 프랑스 니스의 샤갈 미술관에 갔다가 한눈에 반해버렸던 마크 샤갈의 전시회 마지막 날.


밀라노 중앙역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고 두오모로 향합니다. 밀라노 두오모 지하철 역에서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면, 확 하고 눈앞에 들어오는 새하얀 대리석의 웅장하고 섬세한 두오모! 언제 봐도 탄성이 나옵니다. 아! 다시 한번 감탄.


'이렇게 추운 겨울날 누가 아침부터 미술 전시회를 보러 갈까?' 싶었는데, 헉! 저의 오산이었군요. 밀라노 빨라쪼 레알레 성에서 시작된 줄은 구불구불 구렁이 허리를 휘감고도 남습니다. 얼른 줄의 맨 뒤로 가서 구렁이 길이를 한 뼘 더 늘렸지요. 처음엔 몰랐습니다. 이 줄이 그렇게 줄어들지 않을 줄은요.


아, 그런데 그나저나 너무 춥군요. '너무 추워서 그런가? 화장실도 가고 싶네, 어쩌지?' 싶던 찰나, 앞의 빵모자 아가씨가 말을 걸어옵니다.  "저..... 죄송한데요..." "네?"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려고 하는데, 제 자리 좀 맡아 주시겠어요?" 잠깐 자리를 맡아준 덕에 말을 텄습니다. 이 빵모자 아가씨 이야기를 들어보니 토리노에서 첫 기차를 타고 온 저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었군요. 이 여성은 제노바에서 비행기를 타고 어제 저녁에 왔답니다. 일찍 줄을 서려고 말이지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 긴 기다림, 말동무가 있어서요. 강추위에 손발은 점점 곱아들어갑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아무리 기다려도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군요. 줄어들긴 커녕 돌아보니 어느새 두오모 앞까지 울타리를 치듯 줄이 늘어섰습니다. 내 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뒷줄이 길어지니 약간 위로가 되는 건 무슨 심리지요?


롱부츠, 두꺼운 코트, 두툼한 장갑에 모자, 머플러까지 칭칭 감아매고 대비를 했건만...... 응달에서의 꼼작 없는 오랜 기다림은 발끝부터 머리 끝까지 얼어붙게 만듭니다. '이 추위를 녹여줄 뭔가가 필요한데......' "저.......빈 부를레 마실래요?" 이번엔 제가 말을 꺼냅니다. "네?" "너무 추워서요. 뜨거운 와인 한 잔 하면 조금 낫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이네요!" 여자가 활짝 웃습니다. 이번엔 제가 그 제노바에서 온 아가씨에게 자리를 맡기고 근처 노천 매점에 빈 부를레를 사러 갑니다. 후후 불며 김 나는 빈부를레를 홀짝이니 조금 훈훈한 기운이 돕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정말로 언제까지 기다릴 생각일까요? 제자리에서 발을 그야말로 동동동동 구르면서, 부르르 몸을 떨어가면서, 이야기도 나누면서 아무리 기다려도 앞줄이 한 뼘 줄어들면 훅 하고 뒷줄은 1미터가 늘어납니다. 기다긴 기다림...... 천국으로 가는 입장 티켓 사기도 이렇게 어려울까요?


혹독한 추위와 그냥 갈까 보다 하는 유혹과 싸우면서 샤갈 전시회 티켓을 손에 쥔 건 장장 줄을 서서 기다린 지 7시간이 훌쩍 넘은 때였습니다. 미술관 폐장 시간 40분 전에야 미술관 문지방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빵모자 아가씨와 저는 마라톤 결승지점 테이프라도  끊듯이, 달리듯 허겁지겁 미술관에 들어섰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추위에 떨던 오랜 기다림은 뇌리에 남습니다만, 아쉽게도 샤갈의 작품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점 하나. 빨라쪼 레알레 궁전 앞에서 추위에 떨며 하루 종일 차례를 기다리면서 생각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옆 밀라노 두오모 앞 광장은 저렇게 햇살이 잘 들고 환하고 따뜻한데, 어째서 이렇게 밀라노 빨라쪼 레알레 앞 궁전 광장은 이렇게 햇살 하나 들지 않고 어둡고 추울까요? 왕궁이 먼저였는지, 교회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단 하나 명확하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건, 당시 교회의 힘이 왕궁보다 세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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