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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Sep 23. 2022

흑돼지를 짝사랑한 남자

포항 송학농장 이한보름 대표를 이탈리아에서 만나다

이 정도면 지독한 짝사랑이다. 그렇지 않다면 절실한 종교다.


한국 유일 재래종 흑돼지 재배 농가, 멸종되었던 한국 재래 흑돼지 복원 2대째, 재래 돼지 복원을 위해 들어간 시간만 40년, 투자 금액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부친의 뜻을 따라 대학에서도 DNA 복원을 전공했다. 4000마리 백돼지를 키워 번 돈은 300마리 흑돼지 종자 유지를 위해 사용한다.


흑돈 1 킬로그램에 50만 원!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돼지고기를 파는 남자. 포항 송학농장 이한보름 대표를 이탈리아 피에몬테에서 만났다. 후학을 가르치는 일도 잠시 뒤로 하고 이탈리아까지 날아온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뭐라구요? 흑돼지 1킬로에 50 ????? 그렇다면  돼지도   줘요.  싸게  테니." 이탈리아 돼지 농가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이 둥그레졌다. 그렇다. 그는 흑돼지고기를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값에 파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가 흑돼지를 통해 얼마를 벌까? 그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백돼지를 키워  돈으로 흑돼지 연구에 사용합니다."


"대학에서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었습니다. 축산업이 사는 길은 대규모 공장화 아니면 차별화라구요. 자동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공장화를 하는 건 쉽습니다. 자본만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충분한 자본이 있는 건 아니지요. 그렇다면 차별화입니다. 하지만 그 차별화가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저는 한국 흑돼지라는 차별화 전략으로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한국 최초의 모델을 만들고 싶습니다."


돼지 축산 지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료는 100프로 수입에 의존한다. 산악 지방이 70프로를 차지하는 한국에서 돼지에게 먹일 곡물을 재배할 땅이 부족한 까닭이다. 하지만 올해 사료값은 50프로 이상 상승했다. 더구나 돼지 페스트까지 덮쳐 돼지 축산 농가는 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후학 양성도 2주 보류한 채, 이탈리아로 날아왔다. "경제적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흑돼지 농가 모델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가 없는 시간도 쪼개 스페인, 프랑스 등 끊임없이 흑돼지 농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이유다.


기대했던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중부 엔나(Enna)의 한 돼지 축산 업체를 나서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생각한 모델과 많이 다르군요."산속에서 방목하며 흑돼지를 자연적으로 키우는 소규모 농가는 업체에 돼지를 헐값에 팔고,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는 건 농가가 아니라 결국 가공 및 생산업체였다.


짧은 일주일 간의 여행. 시간이 없었다. 그는 생각하는 모델을 찾기 위해 이탈리아 최남단 시칠리아에서 최북단 피에몬테 주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하지만 짧은 여정 속의 또 다른 여행은 그의 생각만큼 순탄하지는 않았다. "외국을 여러 번 나가 보았지만 제 평생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출발 전 갑자기 결항된 비행기, 더구나 당일 피에몬테 주로 가는 다른 비행기는 모두 매진이었다. 결국 차선책은 카타니아 공항에서 멀리 떨어진 팔레르모 공항까지의 이동, 피에몬테 주에 위치한 가까운 토리노 공항이 아니라 밀라노 말펜사 공항 도착, 밀라노에서 토리노, 토리노에서 다시 피에몬테 작은 시골 마을의 흑돼지 농장으로. 한국과 이탈리아의 시차 7시간까지 감안하면 험한 여정이었다.




팔레르모 공항 근처 숙소에서 겨우 두 시간을 눈을 붙이고 강행된 여행 끝에 피곤할 법도 했지만, 케라스코(Cherasco)에 위치한 흑돼지 방목 숲을 찾았을 때, 그의 눈은 기쁨으로 빛났다.


도무지 돼지가 살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숲은 마치 공원처럼 오솔길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오래전 피에몬테 사람들은 집집마다 두세 마리씩 흑돼지를 산에 방목해서 키웠어요. 숲을 깨끗하게 정리할 목적이었죠. 흑돼지 몇 마리면 사람이 들어가지도 못할 만큼 버려진 야산도 깨끗하게 정리가 되지요. 풀뿌리, 도토리, 야생 밤 등을 먹고 자라니 흑돼지를 위해서는 따로 사료값도 들지 않았어요. 더구나 고기 맛도 좋으니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주고 청소도 해 주는 고마운 동물이었던 겁니다."


멸종되었던 피에몬테 주 흑돼지 복원에 성공, 2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방목 사육에 들어간 안드레아 로메로( Andrea Romero) 씨의 설명을 들으며 숲 속을 걷던 중, 갑자기 꿀꿀거리며 돼지들이 나타났다. 한 마리, 두 마리가 아니었다. 돼지들은 누군가 커다란 자석으로 당기기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다가섰다. 어떤 두려움이나 겁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자신들이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하기라도 한 양 말이다.


일천 사백 육십팔 킬로미터. 시칠리아 돼지 농장에서 그가 원하던 피에몬테 농장까지의 거리. 멀리서 찾아온 그를 반기듯, 마치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람이라도 되는 듯, 크고 작은 흑돼지들은 꿀꿀거리며 그의 뒤를 졸졸졸 따라왔다. "돼지들이 호기심이 많아서 그럴 겁니다."  한국 재래종 흑돼지 복원의 산 증인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돼지고기의 품질은 혈통, 환경, 먹이와 크게 관련됩니다. 이곳의 돼지들은 인간과 환경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랍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공격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요. 공격성 유무는 돼지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커다란 지표가 됩니다." 안드레아 씨의 설명을 듣고, 이한보름 씨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이 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농장도 이렇게 숲 속에 있나요?" 이탈리아 흑돼지 농장 주인의 질문에 이한보름 씨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한국은 환경오염 문제로 시멘트 위에서만 돼지를 키울 수 있습니다." 안드레아 씨는 굉장히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아쉬운 일이군요."


여러 가지 질문을 주고받고 난 후, 안드레아 씨의 점심 초대가 이어졌다. 안드레아 씨의 부인은 흑돼지를 이용해 여러 가지 핑거푸드, 직접 나무 화덕에서 구운 빵,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이웃이 만든 수제 맥주와 와인으로 손님들을 반갑게 맞았다. 프로 패션모델을 하던 센스가 엿보이는 조화롭게 꾸며진 식탁, 탁 트인 시원한 공간, 멀리 보이는 포도밭 경치는 저절로 눈이 갔다. "이런 농가 체험이라면 한국 농가에도 좋은 모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페리티보를 하며 이야기를 나눌수록 안드레아 씨와 이한보름 씨는 외롭게 싸우던 자신의 축산 철학을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는 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반나절 안드레아 씨의 농장만 견학하고 그대로 헤어지기는 아쉬웠다.

 

'아쉽지만 다음에.....'라는 말은 힘이 없지 않은가? 쇠뿔도 단 김에다! 이한보름 씨가 피에몬테를 떠나기 전 마지막 날, 안드레아 씨는 자신이 협업하는 살라미 제조 업체에 이한보름 씨를 초대했다. 자신도 피에몬테 전통 혈통 암소 파쏘나와 피에몬테 백돼지를 직접 키워 도축, 가공, 판매를 하지만 안드레아 씨가 산에 방목으로 키우는 흑돼지의 품질에 크게 감동해서 기꺼이 함께 손을 잡았다는 안드레아 씨의 사업 파트너 이야기를 듣고 이한보름 씨는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저도 여러분처럼 좋은 파트너를 만나고 싶군요. 한국은 도축장 규모 규제가 엄격해서 백돈 100마리를 도축하러 갈 때 흑돈 1마리를 함께 끼워가고 있습니다. 도축이 쉽지 않아 소규모 축산 농가들은 여러 마리를 모아 한 달에 겨우 한 번 도축할 정도니 큰 어려움이 있어요."

살라미를 만드는 공정을 견학하며, 이한보름 씨는 자신이 시도해 한 달까지 성공한 흑돈 드라이 에이징(Dry Aging) 경험을, 살라미 가공 업체  끼아뻴라(chiapella)에서는 바롤로 와인 살라미, 트러플(송로 버섯) 살라미 개발 등 부가 가치를 높이는 전략과 부드럽게 살라미를 숙성시키는 기술을 숨김없이 공유했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 만남은 역시 축배로 끝나야 하는 게 아닐까? 안드레아 씨가 방목해서 키우고 사업 파트너 끼아뻴라에서 도축한 흑돼지고기 요리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은 다시 마주 앉았다. 쓰리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삐아짜 두오모(Piazza Duomo)에서의 점심이었다. 2022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19위의 셰프 엔리코 크리빠(Enrico Crippa)는 이틀 전 급하게 부탁받은 흑돼지 요리를 그들의 테이블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 칼라브리아식 매운 돼지 살시차 인두야('nduja)와 새우, 훈제한 흑돼지고기로 속을 채운 둥근 라비올리, 커피 버터를 곁들인 흑돼지갈비 구이, 마지막으로 한국인인 이한보름 씨를 배려한 대추 요리가 나왔다. 피에몬테 멸종 흑돼지 복원 생산자와 멀리서 날아온 한국 멸종 흑돼지 복원 생산자의 만남은 디저트와 삐꼴라 파스티체리아를 끝으로 이렇게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지금이 끝이 아닌 듯 하다.



"이한보름 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어요. 우리, 꼭 다시 이곳 피에몬테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함께 이탈리아와 한국은 물론, 전세계 재래 흑돼지 복원 사업의 좋은 예가 되어 봅시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안드레아 씨와 이한보름 씨, 맞잡은 손을 놓기 아쉬운 듯 보였지만 밀라노 행 비행기를 위해 서둘러 일어나야 했다. "한국 귀국 후 계획이요? 한 이틀 급히 정리할 것들을 하고 며칠 후 주짓수 대회가 있습니다." 그는 밀라노에서도 관광은 둘째치고 주짓수 체육관부터 알아봤다고 한다. 흑돼지 복원과 상업화, 쉽지 않은 길을 오래가는 강한 정신력을 가지려면 강한 체력이 받쳐 주어야 할 것이다. 돼지 페스트도 결연한 이한보름 씨 표정 앞에서는 겁이 나서 달아날 것 같다.


재래 흑돼지 상업 성공 모델로 자리매김 후, 흑돼지 방목이 가능하도록 제도 개선 건의를 하고 싶다는 이한보름 씨, 그의 행보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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