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지 않는다면, 오늘 당장 해보자
올해 초 드디어 이탈리아 공인 소믈리에 코스를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신청하고 싶은 코스다. 마침 쉬는 날 저녁마다 코스가 편성되어서 기쁘게 신청했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기쁜 일만 이어지지는 않더라. 난데없이 코로나 사태가 벌어졌다. 모든 코스는 올스탑.
6월 중순부터 다시 코스가 진행된다. 다만, 석 달 가까이 코스를 쉰 탓에 일정이 무리하게 잡혔다. 내가 쉬는 화요일 말고도 목요일 저녁까지 일주일 두 번이다. 난감하다. 레스토랑 사정이 엉망이 아닌가. 내가 홀에서 일하는 서버도 아니고, '저, 소믈리에 코스가 그렇게 됐네요. 목요일 저녁 서비스는 쉴게요'하면 칼 맞기 쉬울 듯싶다. 하하하, 그저 웃는다.
뭐, 일이 그렇게 됐다. 내가 없다고 코스가 안 돌아가진 않을 것이고, 내가 없어도 레스토랑은 잘 굴러갈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입을 뗀다면 아마도...... '아, 소믈리에 코스 가고 싶다고? 그냥 영영 가버렷' 소리나 듣게 될지도 모른다. 쉬는 날인 화요일은 참석하되, 일하는 목요일은 미리 레스토랑 예약 상황을 잘 보고 입을 뗄지 다물지 판단할 수밖에.
소믈리에 첫 수업에서 협회 회장이 말했다. "하나 분명히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코스가 끝나고, 소믈리에 공인 자격증을 따더라도,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아야 해요."
아, 메타 인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아는 능력. 그저 들었다고 아는 것은 아니다. 소믈리에 자격증을 땄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아, 와인 병은 그렇게 잡으면 안 돼지요. 에티켓을 가리지 말고 서빙해 주세요.'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소믈리에 회장 얼굴은 물론 귀까지 빨갛게 만들었던 코스 수강생들 에피소드가 많다고 했다.
나는 알면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속셈은 이랬다. 일 년 반이 걸리는 이탈리아 공인 소믈리에 코스를 모두 마치고, 소믈리에 시험을 통과한다. 그리고, 와인 관련 글을 쓴다. 1년 반의 소믈리에 코스를 통해 와인을 알아가고, 그렇게 더 와인을 좋아하고, 와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첫 수업부터 협회 회장이 던진 돌을 바로 맞게 될 줄이야. 나는 소믈리에 코스를 끝내더라도 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와인에 대해 글을 쓰려던 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는가?
문득 든 생각. 몰라도 좋아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떤 사람이 좋아지는 것처럼. 와인이 그랬다. 전혀 모르는데, 좋았다.
협회 회장 왈, 공인 자격증이 다가 아니다. 와인은 팔꿈치를 수 백 번 수 천 번 들어 올려가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응? 팔꿈치를 들어 올려?' 아, 그렇다. 와인 잔에서 와인이 입술을 지나 입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려면 팔꿈치를 들어 올려야 한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안다고, 와인도 마셔본 놈이 알지 않을까?
앞으로도 나는 와인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고 나서도. 다만, 나는 와인이 좋다. 한 잔, 한 잔이 모두 다른 소중한 경험이다. 하지만, 나의 기억력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그러니 적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기억할 수 있다. 이쯤에서 계획을 수정하기로 하자. 알아야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면, 그저 나의 기억을 위해 담담히 기록을 하자. 그저 한 잔 한 잔, 나의 경험들을 기억하기 위해 적어 나가겠다.
"네가 좋아하는 걸 해. 네가 좋아서 한 건, 그냥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거 아니?" 지인의 조언이다.
그렇다면, 나처럼 와인이 이유도 모르면서 좋은 사람, 어려운 말을 쏟아내는 소위 와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뱉어내는 수학공식 같은 설명에 지친 사람이 있다면. 그저 그런 나의 개인적 경험의 기록이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프로필? 어...... '저, 매일 와인 마시는 여잡니다만'
와인을 좋아하고, 신의 축복을 과하게 내린 와인 생산지에 거주하고, 매일 와인 마시는 사람으로서, 오늘은 그저 아주 쉬운 팁을 하나 적고 싶다.
"좋은 와인과 좋은 사람 구별법"
몇 년 산이다, 어디서 재배됐다, 와이너리가 어떻다, 숙성을 몇 년 했다, 밸런스가 어떻다, 죽기 전 꼭 마셔야 할 와인이라고 생각한다...... 일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라벨이 주는 권위가 언제나 좋은 와인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를 때는 안전한 선택을 많이 하기 나름이다. 비싸면 좋을 거라는 생각이 그렇다. 하지만, 계급장 떼고 하는 경기는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올 때도 많은 법이다. 수백 명의 심사위원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는 아스티 두야도르 Douja d'Or에서 백 유로를 훅 넘는 와인도 못 탄 상을 고작 오 유로 짜리 와인이 타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가치를 인정받지 못 한 작은 와이너리의 와인이 수많은 사람들이 좋은 와인이라고 인정해 높은 가격을 매긴 와인을 때려눕힌 것이다. 와인도 사람도 누군가 알아봐 주기 전까지는 그 가치를 알지 못한다. 꽃이 피고 나서야, 열매가 맺고 나서야 그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누구나 좋은 와인과 좋은 사람을 아주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둘 이서 한 병을 앞에 놓고 쉽게 마셔지는가? 두 명이서 좋은 와인을 앞에 놓고 한두 시간 안에 와인이 바닥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렇게 좋은 와인은 아니다. 좋다, 별로다는 모두 개인적 취향에 달려 있다. 200유로 넘는 와인이 20유로 보다 못할 때도 있다. 와인이 어렵거나, 같이 마시는 사람이 별로거나.
운명의 상대를 알아보는 법은? 함께 괜찮은 와인 한 병을 놓고 앉아 보라. 진도가 어떻게 나가는가?
와인도 사람도 라벨에, 가격에, 겉포장에 너무 신경 쓰지 말자. 자신의 마음에 드는 와인이 가장 좋은 와인,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