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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Jun 14. 2020

뇨끼를 먹는 시간

이탈리아 소울 푸드 Soul Food 감자 뇨끼 Gnocchi 이야기

여름이 다가오나 봅니다. 한국에서도 날이 많이 더워지고 곧 장마가 시작이라더니요. 며칠동안 급작스레 비가 자주도 옵니다. 오늘도 혹시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요, 오후가 되니 ‘우르르 쾅쾅’ 요란한 천둥과 번쩍이는 번개가 치며 세찬 비가 줄기차게 내립니다. 공기가 순식간에 습하고 차가워집니다. 공기가 그 축축한 혀로 마음을 핥는 기분입니다. 날씨 따라 기분도 습하고 어둡고 차가워집니다. 이런 날은 다 같이 둘러앉아 먹는 한 접시의 따끈한 뇨끼 한 접시가 생각납니다.



남부 아말피 친구네에서 뇨끼 만드는 걸 처음 보았습니다. 친구 커플은 마치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는 양 아주 천천히 뇨끼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한국인, 제 친구 세넴은 네덜란드 태생이니 우리 둘 다 고분고분 조수 노릇만 할 밖에요. 반은 나폴리 반은 칼라브리아 피가 섞인 100% 이탈리아 남자 장피는 방금 어머니께 전화로 전해 들은 성스러운 레시피를 진지한 얼굴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어쩜 이렇게 이탈리아 사람들은 여자든 남자든 요리에 진심인 걸까요? 뇨끼를 만드는 내내 장피의 영혼이라도 짜서 넣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얼굴에 비쳤습니다.     


어찌어찌 감자를 삶아 반죽이 만들어졌습니다. 계량 따위는 없습니다. 어머니께 설명 들은 대로 너무 질지도 않고 너무 되지도 않게 반죽이 완성되었어요. 장피는 뇨끼 반죽을 얇고 긴 원통 모양으로 만들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 세몰라 밀가루 위에 던졌습니다. 세넴과 저는 포크를 하나씩 들고 재빨리 잘린 반죽을 손에 쥐었죠. 적당히 잘린 짧은 원통형의 반죽을 포크 위에 굴려 한쪽은 오돌토돌 포크 자국을 내고, 반대편은 오목하게 들어가도록 모양을 잡았습니다. 소스가 잘 묻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선풍기도 없는 이탈리아 남부의 여름, 좁은 부엌. 아주 긴 시간 뇨끼 만드는 작업은 더디게 더디게 이어졌습니다. 뇨끼는 말랑해서 완성되고 나서도 손으로 만지면 모양이 쉽게 변합니다. 뇨끼를 하나하나 세몰라 위에 굴려서는 더는 어디에도 들러붙지 않게 고무 스파출러로 살짝 떠서 커다란 원형 체 위에 올렸지요. 뇨끼가 살짝 안착하자 체의 작은 구멍으로 여분의 세몰라 가루가 저절로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멀리서 유기농 농장을 하는 친구네가 직접 토마토를 키우고 만들어 선물한 익힌 병조림 토마토는 작은 조각의 마늘과 바질 잎과 함께 아주 오래 전부터 불에 올라가 작은 부엌 안의 열기를 더합니다. 붉은 토마토 물 표면에는 바닥으로부터 작은 거품이 아주 조금씩 뽀골뽀골 올라옵니다. 마치 소스 팬 바닥에 아주 작은 게 몇 마리가 뻐끔뻐끔 숨 쉬고 있는 것 같아요. 아직 묽은, 병조림 삶은 토마토는 이렇게 여러 시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약불과 인내심, 시간의 마법이 더해지고 나서야 성스러운 뇨끼의 동반자가 됩니다.      



남부의 저녁 식사는 언제나 시간이 늦습니다. 해가 진다고 누구도 바로 밥을 먹진 않지요. 산 중턱 밭에서 밭일을 하고 친구들이 내려오고, 서둘러 해가 지려는 바다로 달려가 풍덩 더운 몸을 식힙니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바다 짠물을 씻어내는 샤워를 하고서야 시원한 맥주나 와인을 한 잔 할 준비가 되지요.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약속 따위는 없습니다. 약속 없이도, 집에 불만 켜져 있으면 ‘딩동!’ 하고 벨이 울리지요. 예고 없이 반가운 친구들이 들이닥친다. 프랑키나가 산에서 방목해서 키운 양과 염소 젖으로 만든 리코타 치즈, 옆 마을 체따라 선장 친구가 만든 앤쵸비 절임, 오돌토돌 그릴 팬에 껍질이 두꺼운 나폴리 빵을 톱처럼 커다란 빵칼로 잘라 토스트 합니다. 프랑키나 옆집에 사는 이웃이 만들었다는 코끝에서 군내가 살짝 감도는 유기농 와인을 각자의 잔에 따릅니다. 잔을 들고는 각자 원하는 자리에 가서 앉지요. 누구는 발코니에서 맨발로 담배를, 누구는 불 꺼진 차가운 난로 옆 1인용 낡은 소파에 푹 파묻힙니다. 누구 하나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나지 않지요. 이렇게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페리티보가 끝나고, 입과 배는 슬슬 음식을 더 받아들일 준비를 합니다.     



드디어 미리 끓고 있던 소금 간 한 커다란 파스타 냄비 뚜껑을 엽니다. “Buttiamo pasta? 파스타를 던져 넣을까?” 파스타를 끓는 물에 넣을 때는 이태리에선 유독 ‘buttare 던지다’라는 동사를 씁니다. 그렇게 낮 동안 정성 들여 하나하나 만든 뇨끼가 퐁당퐁당 벌벌 끓는 소금물에 던져집니다. 

왠만하면 갓 만든 신선한 뇨끼는 냉장고에 넣지 않습니다. 실온의 뇨끼는 파스타 물에 넣어도 온도를 확 내려가지 않게 하니 뇨끼가 풀어질 걱정이 없지요. 밀가루가 적게 들어갈수록 감자 본연의 맛과 포슬함, 부드러움이 살아나 뇨끼의 맛과 질감이 좋아집니다.      



실온 상태에서 물에 던진 뇨끼는 금방 익어 동동 떠오릅니다. 긴 시간 졸이고 졸여 만든 뜨거운 토마토소스를 커다란 도자기 그릇에 담고, 동동 떠올라 익은 뇨끼를 건져서 소스 안에 조심히 넣습니다. 주걱으로 저어버리면 그 오랜 시간 만든 부드러운 뇨끼가 뭉개질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해요. 커다란 소스 볼을 탁탁 쳐서 소스와 익은 뇨끼를 잘 섞이게 합니다.      



커다란 도자기 뇨끼 그릇을 한가운데 놓고, 빙 둘러진 접시에 사이좋게 나누어 담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친구들 몫까지 담고도 뇨끼가 남습니다. 누군가의 몫이 모자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조금씩 적게나 많이 담고, 나중에 들이닥칠 누군가, 혹은 적게 담은 한 접시를 먹고도 배가 아주 고플 누군가를 위해 1인분 정도는 따로 담아 두는 것이 비결입니다.      



이제 프랑키나가 만든 숙성한 리코타, 리코타 살라따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차례대로 돌아갑니다. 작은 치즈 글라인더로 접시 위에 각자 갈아 넣고 싶은 만큼 갈아 올립니다. 같이 올리브 수확에 참여하고 받아온 아말피 언덕에서 해풍을 맞고 자란 신선한 올리브 오일 조금을 살짝 마무리로 접시 위에 두릅니다.      



모두의 접시가 준비되면, “Buon appettito! 맛있게 드세요!” 하는 합창 소리와 함께 달그락달그락 포크질 소리만 들립니다. 대화가 멈추고, 모두 자기 앞의 한 접시, 신성한 뇨끼를 영접합니다. 부드러운 뇨끼와 새콤한 토마토소스, 구수한 리코따 살라따가 입 속에서, 혀 위에서 눈 녹듯이 사르르 사라집니다.      



“아, 이건 정말 영혼의 양식 같아!” ‘소울 푸드’란 이런 것일까요? 이 한 접시를 준비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정성을 다했습니다. 토마토 씨앗부터 틔워 키운 후 정성껏 만든 토마토소스, 버려진 돌산을 개간해 심어 캐낸 감자, 토종 밀가루, 염소와 양을 키워 그 젖으로 만든 리코타 치즈, 아말피 해안가에서 직접 수확을 도와주고 얻은 올리브 오일, 어느 것 하나 쉽게 이 식탁까지 온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소스까지 빵에 찍어 싹싹 닦아 입으로 가져갑니다. 아! 사르르...... 감자의 영혼이 내게 입을 맞춥니다.    



뜨거운 뇨끼 한 접시와 함께 어둡고 차가운 마음이 사르르 녹아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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