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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Nov 05. 2022

자! 수술부터 합시다! 네???

빨라도 너무 빠른 한국 초광속 의료 시스템

한국에서는 전혀 듣지 못하고 살다가 이탈리아에 와서야 처음으로 들은 말이 있습니다.

“poco per volta(한 번에 조금씩)”, “piano piano(천천히 천천히)”


한국에서는 언제나 “빨리빨리!”, “신속 정확!”이 미덕이었는데 말이죠.


신속하면서 정확하기란 얼마나 어렵습니까? 신속하면 정확하기 어렵고, 정확하려면 신중히 시간을 요하지요.


2022년 초여름, 드디어 코로나 시국이 끝나고 한국에 가족들 얼굴을 보러 다녀왔습니다. 들어간 김에 간단하게는 스케일링부터 위, 대장 내시경은 물론 전체 건강검진을 다 했습니다. 가장 큰 관심은 작년 10월 말에 문제가 생긴 오른쪽 귀 청력 문제였지만, 이제 계란 한 판 반이 다 되어가는 나이인 지라 건강 문제는 분수처럼 여기저기서 터지더군요.


갑상선, 유방, 자궁. 세 군데에서 문제 소견이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출국 날짜는 정해져 있었지요. 이탈리아라면 몇 달은 기다렸어야 할 초음파 검사도 예약부터 검사, 의사 문진까지 제대로 병원만 선택하면 하루 만에 되는 나라. 정말로 “아! 역시 한국!”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루 만에 검사는 물론, 의사 문진까진 끝냈다고 하니 이탈리아 친구들은 이구동성 "Com'è possibile?(어떻게 그게 가능해?)"라며 하나같이 놀라더군요. 한국의 재빠른 의료 시스템 덕분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우쭐해졌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디를 가도 버스, 지하철 광고판을 도배한 과열된 병원 광고를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순서가 바뀐 것 같은 이상한 권유를 하는 병원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유방 검사 후, 조직 결과가 정확히 나오기도 전에 의사는 수술을 권하더군요. 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의사는 “납득이 안 되세요? 출국 날짜가 급하시니까 제 소견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수술을 권하는 게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결과를 보고 상황이 나쁘면 비행기 스케줄을 연기하겠습니다. 결과도 모르는데 수술을 바로 하는 건 순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제 몸에 대한 결정권을 제가 가지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출국 예정 날짜 며칠 전에 나온 유방암 조직 검사 결과는 음성으로 나왔습니다. 경과를 보며 1~2년 안에 추적 검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다음은 갑상선. 초음파 검사에서 모양이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큰 병원을 가라는 조언을 들었지요.

처음 간 병원에서는 조직 검사를 했지만 결과가 출국 전까지 나올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결과가 빨리 나오는 병원을 찾아 다시 조직 검사를 해야 했지요. 이틀 만에 두 번의 세침 조직 검사라 조금 심적 부담이 있었지만, 의사 선생님과 상담 후 결정했고, 지나 보니 잘 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행히 두 번째 병원에서 조금 이상은 있지만 1년 안에 재검을 하고 추적 검사를 하자는 소견을 들었거든요.

출국 전날 첫 번째 병원에서 연락이 와 다시 찾았습니다. "암은 아니지만, 굳이 키울 필요 없잖아? 수술해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싹 태워 버리자고!" 수술비 상담은 밖에서 코디랑 하라는 한 갑상선 병원 원장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코디는 몇 백만 원짜리 수술을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저는 암도 아닌데 수술할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모 두 분이 갑상선에 이상이 있어서 어머니는 제가 병원에 가기 전에 신신당부하셨거든요. "지윤아, 옛날에는 의사 말이면 다 맞는 줄 알고 수술하라면 다 하고 했는데, 갑상선은 워낙 부위도 작고 함부로 건드리면 부작용이 더 크다더라. 너희 이모도 약 먹고 관리 중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병이 발견되고도 몇 달을 기다려 수술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의 초고속 의료 서비스에 익숙하다 보니, 이탈리아에서 병원을 가게 되면 이러다 병을 더 키우는 게 아닌지 느림보 의료 행정에 화를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지요. 화가 나서 병이 더 깊어질 지경입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전문의가 수술을 권하니 빨라도 너무 빠릅니다.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의료 시스템은 전혀 다르지만 놀랍게도 이탈리아인과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둘 다 높지요. 유엔이 발표한 2018년 세계 인구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15-2020년의 남녀 평균 기대수명 순위는 한국이 세계 2위, 이탈리아가 세계 3위랍니다. '응? 이렇게 느려 터지고 환자를 뱅뱅이 돌리는 나라의 기대수명이 최첨단 의료기술을 자랑하는 한국 바로 뒤라고?' 놀라울 지경입니다.


분초를 다투며 재빠른 방역이 필요했던 코로나 시국에서는 한국 의료 시스템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한국인의 건강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이탈리아인에 비해 월등히 높습니다. 국가적으로 정기적인 건강 검진을 유도하고 의료 시스템의 수준과 신속도도 다른 어느 나라에 비할 바 못 되지요.


이탈리아는 의료 시스템은 그야말로 느림보입니다. 주치의 스튜디오에서 상담 예약, ASL에서 건강 검진 예약, 몇 달의 기다림 후 건강 검진, 다시 검사 결과가 나오는 데만 몇 주, 결과를 가지고 전문의 문진 예약, 그 후 문진 결과에 따라 방향 결정을 합니다. 큰 병을 알고도 몇 달을 기다려야 수술이 됩니다.


한국인의 기대 수명이 긴 이유는 잦은 검진과 빠른 대처, 이탈리아 인의 경우 낙관적인 성격과 속도 따위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달관의 자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단 암이나 이상 세포 문제만 그러까요? ‘시간은 금’, ‘빨리빨리’가 중요한 한국에서는 모든 방면에서 시간 낭비란 그야말로 악덕 중의 악덕이지요.

하지만 어쩌면 시간 단축이 최고의 가치로 치부되다 보니 시간을 두고 결정해야 할 문제, 변수가 있는 문제도 너무 빨리 결정하고 문제를 제거하는 데만 집중하지 않나 하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적어도 제 몸 문제만큼은, 건강만큼은 최고로 빠른 선택이 아니라 신체에 최소한의 부담을 주는 선택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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