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낮달 Sep 26. 2024

목적 | 살아감에 의문이 없는 마음으로

내가 왜 살아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삶의 목적은 죽음이에요.”


예전에 읽었던 『왜 살아야 하는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저자인 하우스 켈러의 열 살짜리 아들의 말이다. 삶은 결국 죽음을 향하게 되며, 그게 무엇이든 살아있는 존재라면 언젠가는 죽는다. 물론 하우스 켈러는 이것이 일부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본인이 뜻했던 진정한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어차피 삶의 목적지가 죽음이라면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고, 누구나 죽음을 위해 삶을 유지하다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늘 살아감에 질문을 던졌다. 어차피 도착하는 곳이 죽음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면서 고통을 감수하고 매일마다 의식주를 해결하려 노력하면서, 삶이라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와서 우주의 시간에서 찰나의 찰나보다도 더 짧은 시간을 허락받고 그 시간 동안 삶이라는 것을 살아내야만 하는가?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죽음과 무(無)와 공(空)이 더 자연스러운 이 우주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을 것에 시간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 찰나를 존재하며, 또 어떠한 것을 남기고 떠날 수 있을까? 그게 바로 우리가 이곳에 온 의미가 아닐까?


학생일 시절부터 삶과 죽음에 철학적 물음을 가지고, 철학자나 사상가 같은 이 세상의 똑똑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읽으면서 삶의 의미를 좇았다. 누군가는 삶에는 아무런 이유도 의미도 없다고, 태어난 것은 그저 태어난 것이고, 살아 있는 것들은 그저 살아 있을 뿐이니 삶의 의미에 아무리 질문을 던져 보았자 결론은 없다고 했다.


말도 맞다. 과거의 수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도 삶의 의미나 죽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이렇다 할 명확한 답은 도출해내지 못했으니까.




내가 사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더 잘 살아내고 싶은 마음으로 던져대던 삶에 대한 질문은, 내가 우울증을 앓게 되면서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세상에 어떤 것을 남기고 갈 수 있을까’ 등과 같이, 나의 존재와 나의 삶의 의미 속에서 어떤 진주를 발견해 낼 수 있을까 하며 던지던 질문은 어느새 의문이 되었다.

‘숨을 유지하고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쇼펜하우어도 삶은 고통이니 죽음이 삶보다 더 낫다고 했는데, 우리는 왜 굳이 삶이라는 것을 붙잡고 있어야만 하나?’와 같은 삶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회의적인 의문이었다.


사실 이 글을 수정 중에도 나는 자살 시도 아닌 자살 시도(?)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입원 중에 면담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에게, 정확하게 무슨 이야기들을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음에도 단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나는 그때 의사에게 ‘내가 왜 살아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내가 살아 있음에 의문이 든다. 사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물어도 와닿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살아 있는 이유를, 그리고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를 자꾸만 확인해야겠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그래서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음에도, 나는 문득 푸른 하늘에 샴푸 거품처럼 하얗게 몽글거리며 피어나는 구름 하나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길거리를 당당하고 떳떳하게 떠돌며 생을 잇는 길고양이들이 너무 귀엽고 애틋해서, 그럴 때만큼 그렇게 살고 싶은 기분이 든 적이 없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면서도, 세상의 작고 무용한, 수많은 것들이 늘 나를 아직은 좀 더 살고 싶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드는 의문들을, 질문으로 바꿔서 세상에 던져 보기로 했다.


작고도 무용하지만, 예쁘고 애틋한 세상 모든 존재들에게 애정을 담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