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 파이(Alpha Phi, ΑΦ): 영어권 대학의 사교 모임의 하나로, 요즘으로 치면 ‘찐친, 소울메이트’와 유사한 개념이다.
바롬관 305호 거실. 16명의 여자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앉아있었다. ‘바롬’을 미룰대로 미룬 이들이었다. 바롬을 쉽게 표현하자면, 하이틴 영화 속 기숙사 생활을 2주 경험해보는 거다. 여대에, 그것도 원치 않는 기숙사 생활이라니! 극혐하던 바롬이 대학 생활을 말하는 키워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바롬에서 영혼의 쌍둥이인 연과 람을 만났다. 우리는 성격도, 추구미도 달랐다. 연은 위트 있고, 람은 쿨하면서 진중한 성격이었다. 둘은 쿨한 성격답게 옷을 입는 스타일도 비슷했다. 반면 나는 예민했으며,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다. 60년대 패션계를 주름잡았던 트위기처럼 말이다.
첫인상과는 달리 우리는 잘 맞았다. 농담과 헛소리와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죽하면, 옆방에서 "잠 좀 자자!"며 벽을 치기도 했다. 이들과 같이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렇게 전공도 학번도 성격도 달랐던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내 글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물을 정도로 말이다.
바롬이 끝나고도 우리는 붙어다녔다. 학교 스타벅스에서, 이태원과 압구정, 한남동의 느낌 좋은 와인바나 맛집, 카페에서. 그리고 시험이 끝나면 -그것이 쪽지 시험일지라도- 클럽에서 신나게 놀다 찜질방에서 잤다. 이들과 함께면 슈퍼 보수인 우리 집도 안심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했다.
“...진짜 이렇게 셋이 친구라고?”
우리의 추구미는 달랐지만, 내면만큼은 영혼의 자매였다. 뇌트워크* 가 된 듯 음악이 나오는 곳이면 어디든 동시에 춤을 췄고, 종종 같은 말을 떠올렸으며, 가치관과 취향도 비슷했다.
*뇌트워크: 세 명의 뇌가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똑같은 언행이나 생각을 해서 만든 단어.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어느 여름 밤. 람의 남자친구였던가, 연의 남친이었던가. 그의 차를 타고 한강 공원에 갔었을 때의 일이다. 라디오에서 ‘All that Jazz’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노래는 하이라이트를 향했다. 마음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셋, 둘, 하나, “…that Jazz!” 우리는 엔딩 포즈까지 잡으며 넘버의 대미를 장식했다.
“아~ 이래서 셋이 친하구나.”
이들 앞에서 나의 별난 성격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됐다. 이래서 성에 안 차고 저래서 헤어졌으면, 곧 우리도 질리는 거 아니냐며 놀려댔지만. 그 영화는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하다든지-그래? 돈 아꼈다-, 이 식당은 메뉴가 너무 다양해서 별로라든지-역시 쩝쩝박사- 하는 까탈스러움도 장점이 되었다.
자유분방했던 우리는 어느새 성숙해졌다. 연은 한국을 떠나 타국에 정착해, 일과 사랑을 동시에 잡았다. 람은 커리어 전환을 했다. 툴툴대지만, 더 나아지기 위해 성실히 노력하고 있다. 광고회사에 다니던 나는 약속을 펑크내기 일쑤였다. 관계란 서로가 노력을 해야하는 건데, 일에 치여 소홀히 대했다. 부채감에 선뜻 연락하지 못했던 내게, 그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이 뜨끈해질 때까지 말을 나누면, 나는 다시 바롬관 305호로 돌아가곤 했다.
서로를 놀리기 바빴던 우리가, 이제는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나누는 대화의 깊이는 세월과 함께 더욱 깊어졌다. 나만큼 별나고 독특한 그들. 대학 시절의 질풍노도를 함께 한 진정한 소울메이트들. 이들 덕에 지금의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