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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글 Jul 03. 2022

책장을 비우며

나는 물건을 버리는 것이 어렵다.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쌓아두는 편이 심적으로 편하다. 물론 쓰레기를 수집한다는 것은 아니다. 새로 산 물건의 설명서, 이면지, 대학생 시절에 사용한 교재 등등, 내가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일기라든가, 수능 공부할 때 봤던 책이라든가, 지금은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이 내 책장에서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가끔 심심할 때 둘러보면 재미있긴 하지만, 몇 년 동안 펼쳐보지 않은 책들이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했다. 마음을 먹을 필요가 있었고. 그날이 오늘이었다.     


책장 정리를 시작했다. 다하지는 못하고, 조금 했다. 아무래도 오래 걸릴 것 같다. 물건마다 사연이 있고 이유가 있었다. 내가 버리지 못한 물건들을 천천히 살펴보니,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련도 함께 쌓여있다. 내 마음속에만 남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책장에도 꽂혀 있었다.     


책장을 정리한다. 지나간 것들이 떠오른다. 수능 준비를 위해 공부하던 시기에 쓴 책부터 이번 학기 공개수업 지도안까지, 물건을 담으면 웃음을 짓기도 하고 잠시 머뭇거리기도 한다.      


내가 책장 정리가 오래 걸리는 건 내가 게으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성실하게 책을 모으고 이야기를 모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내가 책장 정리가 오래 걸리는 이유는 책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책 하나에 걸려 있는 무수한 이야기가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그저 종이 뭉치라고 생각하면 분리수거함에 넣으면 끝이지만, 책장의 물건들이 단순히 버려야 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책장에 있는 물건들이 처음에 꽂힐 때는 목적을 가지고 왔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며 본래의 필요성을 잃었다. 과거에 구입한 책도, 내가 읽지 않는다면 쓰지 않는다면 그냥 종이 묶음일 뿐이다. 지나간 것에 의미 부여하는 일은 그만두고 종이 묶음을 내놓기로 했다. 새로 채우기 위해선 비우는 일도 필요하다.

     

청소에서도 인생에서도 보내줘야 하는 것들은 보내줘야 한다. 괜찮다. 지금 보내주는 것들은 이미 마음속에 남아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내 삶 곳곳에 남았다. 형태는 달라졌어도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는 데 도움을 줬다. 그래 그거면 된 것이다. 이렇게 청소하며 드는 생각들도 그 물건들 덕분에 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내게 주고 싶었던 건 미련이 아니라 가르침일 것이다.    

 

책장 정리가 언제쯤 끝날지는 모르겠다. 시간이 좀 걸리고 돌아가게 되더라도,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성장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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