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건 악에 가깝다. 3.

선은 여유에서 나오고 바쁘면 악에 가까워 진다.

by 개똥밭

내 아버지는 엘리트 장교였다. '서울의 봄'이 아니었다면 그렇게나 열망하시던 '별'을 달으셨을 것이다. 그렇다. 내 아버지는 욕망가였다. '서울의 봄' 이후에도 내 아버지는 '군바리' 출신이 눈 뜨고 있어도 코 정도는 베어 간다는 민간 시장에서 살아남으셨다. '사장'과 '이사장'이란 직함을 손에 넣었고, 그 손으로 세 명의 대통령과 악수를 했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남들 아버지처럼 저녁 시간에 퇴근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남들 퇴근 시간에 집에 오시면 낯설 정도였다. 당연히 주말도 없었다. 정말 드물게 주말에 집에 계시면 하루 종일 잠만 주무셨다. 욕망이란 놈은 사람을 쉼 없이 채찍질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에게 외식은 행복한 시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가족에겐 달랐다. 내 아버지는 아무리 맛집이라도 음식이 늦게 나오거나 직원 응대가 조금이라도 부실하다 느끼면 말 그대로 '벼락'이 떨어졌다. 그때마다 우리 가족은 민망함과 긴장에 음식 맛을 느끼지도 못했다.


이런 내 개인사를 친한 지인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분은 자신의 동생도 비슷하다며 이런 사연을 전했다.


내 동생놈이 잘나가는 사업가야. 대기업 한 군데 뚫기도 어렵다는 특수 장비를 두 군데나 납품하며 승승장구하고 있거든. 그런데 이 녀석이 식당만 가면 그렇게 무례하고 고압적이야. 심지어 어느 날 도로에서 시비가 붙었는데, 골프채를 꺼내 상대방 차를 박살 내고는 상대방 운전자에게 경찰이 보는 앞에서 수표를 던져 주더라고. 내 동생이지만... 참...


이 이야기는 마치 거울처럼 내 아버지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 내 아버지는 자신이 획득한 모든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잃었다. 햇빛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부질없이 사라진 것이다. 처음에는 무척 고통스러워하셨다. 그러나 시간은 확실히 약이었다. 이후 남은 인연의 끈을 이어 소일거리를 만드시거나 지인들과의 술 한잔이 하루의 일과가 된 그때, 내 아버지는 달라졌다. 가정에서는 아픈 어머니를 돌봤고, 식당에서는 음식을 나르는 직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비록 금전적 여유는 사라졌으나, 시간적 여유가 사람을 바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바쁨에 가려진 내면의 선함이 발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누군가는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그건 인성 차이다"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맞다. 다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이 세상을 다 꿰뚫어 보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동생 사연을 전해준 그 지인의 아버지 이야기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의미심장했다. 이는 환경이 인간 본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더욱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내 아버지는 정말 힘들게 살았어. 정말 나 같으면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가장으로서 생계를 꾸리면서도 다정하고 온화한 아버지로서 정말 부지런히 가족을 챙기고 집안일도 마다하지 않으셨지. 그러다 이제 쉴 만하니 우리 어머니가 쓰러진 거야... 그 뒤 나를 포함한 자식들이야 먹고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대신 아버지가 노구를 이끌고 돌보셨지. 자그마치 10년을 말이야. 그러면서 우리에게 싫은 소리 한번 안 하셨어...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지. 그렇게 몇 주가 지났을 때 갑자기 아버지에게 치매가 오더라고. 그런데 치매 증상에 좀 놀랐어. 남에게 폭력은커녕 욕 한번 안 하셨던 분이 욕을 하고 사람들을 때리려 하시더라고...


우리는 환경의 산물이다.


'선'은 여유에서 나오고 바쁘면 '악'에 가까워 지는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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