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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똥밭 Jan 10. 2021

너는 세상에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그나마 이 정도 세상을 만든 사람들이 있다.

▲ 비리가 능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그러한가? ⓒ Pixabay

유럽 반부패국가역량연구센터(ERCAS)가 발표한 2019년 대한민국의 공공 청렴지수(IPI, Index of public Integrity)는 117개국 중 19위, 아시아 국가 중에는 1위라고 한다. 이 지표가 처음 발표된 2015년에는 23위, 2017년에는 24위였단다.


어쩌면 지금 세대에게는 이게 어떤 수치인지 실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단적인 예로 예전에는 교통단속에 걸리면 면허증 뒤에 만 원짜리를 끼워주고 오전에 신청하면 오후가 되어야 겨우 발급받을 수 있었던 그 시절 등기소의 느린 행정도 - 전산화되기 전 등기소의 풍경이다. - '급행료' 한방이면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예전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오래 전도 아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문화 충격'에 가까운 이런 부조리가 한때는 일상이었고 관행이었던 시대가 바로 얼마 전까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변화는 어떤 이유 때문일까? 저명한 교육가, 시민운동가 또는 정치적 리더들의 노력 덕분일까? 아니면 점점 치밀해지는 관련 법규로 인한 '공포감' 때문일까? 난 적어도 그게 다는 아니라고 본다. 정말 소시민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름의 '뜨거운 소신'으로 이런 관행맞선 사람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알겠지만 이건 정말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예전 내가 몸담았던 회사는 - 사실 내 아버지 회사였다. ^^ - 국가기관에 물건을 제조 납품하는 업을 주업으로 하는 회사였다. 그렇기에 거래처 담당자는 공무원들이었다. 그때는 김영란법도 없던 시절인 만큼 담당자에 대한 식사 접대는 일상이었고 촌지도 심심치 않게 전달되었다. 심지어는 서울에 공무로 올라온 지방 공무원이 - 오래전에 거래 관계가 끝나 연락도 없었던 공무원 - 뜬금없이 전화해서 식사 접대받고 교통비까지 받아갔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뻔뻔한 인간들이었다. ^^;;


그런 '부조리 전성시대'에 모난 돌(?) 구 주사란 공무원이 있었다.

(참고로 '주사'란 호칭은 직급이 없는 공무원을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이당~)


납품 완료되고 시일이 좀 지났던 지방 현장에서 갑작스레 연락이 왔다. 우리 회사가 수행한 적업에 '불만이 매우 많다'는 연락이었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이번에 새로운 관리자로 부임한 '구 주사'라고 했다. 구태에 쩔은 우리 회사가 - 누워서 침 뱉기지만 그때 내 생각은 그러했다 -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언제나처럼 관리자가 새로 부임했으니 '인사(?)'를 하라는 관행적인 호출이라 판단한 것이다. 


사실 그 현장은 우리 회사가 하도급을 준 현장이었다. 그리고 당시 IT 기술자가 없었던 우리 회사는 시스템을 직접 컨트롤할 수준이 안되었다. 그러니 하도급 업체가 대충 말아먹은 거다. 총대는 내게 주어졌다. 회사의 IT 장비 담당자로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현장 경험도 전무했던 나를 IT 기술자라고 하도급 업체와 그곳에 보내졌다.  


 일은 하도급 업체가 한 거니 난 옆에서 바지 사장처럼 앉아 있으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상황이 그게 아니었다.  그를 처음 현장에서 마주했을 때 그는 우리 회사를 세금이나 빨아먹는 '기생충'정도로 취급했다. 당시 그의 표정과 행동은 정말 그러했다. 그는 자동화라며 들여온 수억의 장비가 이전의 수동 장비처럼 일일이 돌아다니며 스위치를 눌러야 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는, 장비가 설치 완료되고 운영한 지가 거의 1년 여가 다되어 가던 시점이었다. 그 '구 주사'란 관리자 이전에도 관리자가 있었고 그때 시설을 운영하던 몇몇은 여전히 근무 중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 누구 하나 이런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그도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난 너무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당시 난 막내였으므로 모든 책임에서 면피 가능한 면책 특권(?)이 있었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회사는 내 아버지 회사였다. 그의 비난은 내 아버지를 향한 비난이었다. (당시 그는 내가 사주의 아들임을 몰랐다.)    


결국, 나와 하도급 업체는 몇 달간에 걸쳐,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엄동설한 현장에서 벌벌 떨면서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다 손봐야 했다. 그 사이 그와 많이 친해졌다. 그래서 회사는 그에게 몇번의 식사접대를 시도 했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당시 그의 존재는 우리 회사에 대단히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존재지만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공무원의 '청렴과 성실'은 현재는 물론 이전에도 그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그러나 그 시절 – 물론 지금도 일부 그러하겠지만 - 이 덕목은 '관행'에 빛이 바래 있었고 대부분 시류에 몸을 맡기는 정도였을 뿐, 그 흐름에 역행하려 한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구 주사의 소신 행보가 현실에서 절대 쉬울 리 없었다. 그의 소신은 현실 속에서 시험받을 수밖에 없었다.


현장일이 마무리되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구 주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용건은 며칠 후 상급 기관장이 현장 순시를 오니 납품 업체도 참여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뭔가 남은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고 주저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잠시 한숨을 쉰 후 그 기관장의 저녁 식사 접대와 별도의 '거마비'를 부탁했다. 그 시절은 그러했다. 상급 기관장이 오면 납품 업체가 식사 접대와 '거마비' 그러니까 교통비라는 명분으로 수십만 원 지원은 기본적인 관행이었다. 난 그가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흔쾌히 응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날 행사 후, 그는 나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고 했으나 그의 태도는 예전처럼 당당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소신과 반하는 그때 그 일은 그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비가 온다. ⓒ Pixabay

'북경의 나비가 날갯짓하면 뉴욕에 비가 내린다.'


시적인 이 문장은 '나비효과'라는 물리학의 카오스 이론을 상징하는 문장이다. 이 이론은 기상학계에서 관행적으로 무시하였던 소수점 4자리 이하의 작은 숫자들이 알고 보니 기상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숫자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 이론이라 한다. 이 이론은 비단 물리학에만 적용되는 이론은 아닌 것 같다. '구 주사'를 상징되는 이들의 소신 행위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평가하기도 어려운 작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가 이 정도 수준에라도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들의 작지만 뜨거운 날갯짓이었을지도 모른다.


얼마전 언론을 장식했던 '검사 접대비 96만원'으로 내 기억속에서 소환된 어느 소신 공무원에 대한 단상, 당신은 '구 주사'처럼 세상에 한번이라도 뜨거웠던적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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