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아이와 과거에서 온 엄마가 한 집에 살고 있다.
나는 동네에 전화와 TV가 서너 집 건너 한 대씩 있던 시절에 태어나서 서점 앞에 붙여 놓은 메모지로 약속을 정하던 시절을 지나 삐삐와 컴퓨터와 핸드폰과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디지털 기기의 태동과 소멸을 보아 왔고 PC통신과 인터넷 시대를 지나면서 혁명적인 사회 변화를 겪어 왔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사회 변화의 측면에서 보면 본의 아니게 살아 있는 화석, 걸어 다니는 역사책 정도의 위치에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아직 디지털 시대로 이주해 오지 못한 '디지털 관광객' 수준의 어정쩡한 태도로 '디지털 원주민' 아이를 키우고 있다. 나는 유튜브를 거의 보지 않으며 카톡 이외의 SNS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마트폰, 태블릿, 스마트 TV, ZOOM 등의 기능을 익히고 이용하는 데에 겁이 없다.
아이가 말을 배울 때 나는 은근슬쩍 그 역할을 유튜브에 넘겼다. 물론 엄마, 아빠, 맘마, 물... 등 생존에 꼭 필요한 단어들은 가족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배웠겠지만, 유행어 비속이거나 복잡한 사회적 맥락이 들어 있는 단어들은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서 맥락과 쓰임을 익혔다. 유독 언어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던 아이에게 부모가 띄엄띄엄 설명해 주는 단어로는 언어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수 없었는데 유튜브로 그 단어가 쓰이는 예시가 될 수 있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접함으로써 데이터를 쌓고 거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아이는 디지털 기기에 대한 이해도 놀랍도록 빨랐다. 자기 전에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뭘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는 아이에게 엄마는 "그걸 꼭 말해 줘야 알아?"라고 타박하고, 아이는 거꾸로 새로 바꾼 TV 리모컨의 각각의 버튼의 기능을 몰라 쩔쩔매는 엄마에게 "그걸 꼭 말해 줘야 알아?"라고 되받아치는 상황이 반복됐다.
일방적인 관심과 돌봄만 필요했던 아이가 이제는 자라서 디지털 길치인 엄마와 할머니가 급변하는 시대에 길을 잃지 않도록 꽤나 도움이 된다. 할머니와 함께 외출했을 때는 식당의 키오스크로 대신 주문을 해 주고 엄마에게는 최근 유행하는 밈이나 유튜브 생태계의 맥락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나는 가끔 그걸 가지고 직장 동료들에게 썰을 풀어서 첨단 트렌드를 아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오랫동안 세상의 중력이 나에게는 약하게 작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늘 현실에 발 딛지 못하고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우주를 유영하듯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 아이를 만나게 됐다. 아이는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을 떠도는 나를 지금, 여기로 이끄는 활주로의 불빛이 되어 주었다. 아이는 자기부상열차처럼 혹은 중력이 적은 어느 행성처럼 세상에서 조금 떠 있던 나를 부드럽게 착륙시킨 그래비티다. 나는 오늘도 아이라는 착륙 유도선에 의지해 새로운 세상으로 부드럽게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