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 부여!!
나는 학창 시절 역사 과목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어른이 돼서도 옛날 일들에까지 관심이 미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아이는 별스럽게도 어린이집 다니던 때부터 지금까지 역사에 푹 빠져 있다. 3학년이 되도록 구구단을 못 외우는데 '태정태세문단세'를 한숨에 외고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것은 질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읽고 읽고 보고 보고 만들고 또 만든다. 조선시대 왕 이름을 외우는데 왜 구구단을 못 외울까? 역시 관심과 애정의 차이인 듯싶다. 아이는 또 만들기도 좋아한다. 끊임없이 뭔가를 만든다. 만들기의 재료들은 집안의 소소한 물건들이다. 특히 두루마리 화장지의 심을 버렸다가는 큰일 난다. 집에는 온갖 상자들과 화장지 심지와 요구르트 병과 돌과 나뭇잎들이 굴러다닌다.
그런데 역사와 만들기라는 교집합을 가진 아이들에게 안성맞춤인 만들기 교구가 있다. 바로 EBS에서 만든 '만들면서 공부하는 한국사' 짧게 '만공한국사'다. 역사적인 건물, 물건, 장소 등을 3D 퍼즐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만들기 대상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고 심지어 그 설명을 잘 읽었는지 확인하는 퀴즈도 있다. 무엇보다 역사책 속의 건물이나 물건들을 직접 만들어 보면서 배운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아이는 시중에 나와 있는 만공한국사 시리즈는 거의 다 만들어 봤다. 그중에는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만든 것들도 있는데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거북선'과 '백제금동대향로'다.
역사를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서 우리 가족은 여행할 기회가 생기면 대부분 역사적인 장소들로 간다. 최근에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이순신 장군님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을 하고 있다. 일명 '임진왜란 투어'. 통영, 한산도, 여수, 목포 등 주로 임진왜란 당시 해군 군영과 해전이 있었던 곳들이다. 아이와 역사 여행을 다니면서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에 관해서는 박물관 등 아이를 데리고 다닐 만한 곳이 매우 많고 각각에 전문 해설사 분들도 잘 준비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알리고 싶다. 올해 여름방학에는 어디로 여행을 갈까 생각하다가 문득 아이가 좋아하는 '금동대향로'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검색해 보니 그것이 부여박물관에 있다는 것이다. 이번 여름 방학 여행지는 그렇게 정해졌다. '백제금동대향로'를 보러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우선 2박 숙소를 잡아 놓고 나서 부여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백제문화단지', '궁남지', '나루터와 황포돛배', '수륙양용버스', '부여박물관', '정림사지와 박물관' 등이 검색된다. 부여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단지 '백제금동대향로'를 직접 보는 것을 여행 목표로 잡고 그 밖의 것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좀 늦게 출발해서 5시 반에 마지막 배가 출발한다는 백마강 구드래나루터에 거의 슬라이딩 세이프로 도착했다. 조금 더 늦게 도착했더라면 첫날은 아무 일정 없이 숙소로 들어갈 뻔했다. 배에 앉아 잠깐 숨을 고르고 나서야 백마강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승객은 두 가족 6명이 전부다. 각각 뱃전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나이 든 선장님의 간단한 설명을 들으면서 백마강 전경을 구경했다. 배는 궁녀들이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을 지나 백제시대 지어졌다는 천년 고찰 '고란사'에 승객들을 잠깐 내려줬다. 낮이었다면 좀 더 여유 있게 구경할 수 있지만 지금은 늦은 시간이니 10분만 주겠다고 했다. 궁녀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 지어졌다는 설이 있는 고란사에 바쁘게 올라 참배를 하고 3년이 젊어진다는 약수를 마시고 내려왔다. 좀 더 일찍 왔더라면 부소산 성터 등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데 거기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백마강의 평화롭고 고즈넉한 전경이었다. 배에서 내려 백마강의 낙조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데 마음이 차분해지고 모든 것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하루 종일이라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백마강변 넓게 펼쳐진 잔디밭도 좋았다. 아이는 또 어디선가 주운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메뚜기와 개구리를 찾아다녔다. 엄마와 나는 넓디넓은 초록을 배경으로 각자 한참 동안 셀카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금동대향로'를 보기 전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백마강의 풍경만으로도 여행의 본전을 뽑은 느낌이었다.
구드레 나루터를 떠나 경주의 안압지 못지않은 규모의 백제 시대의 인공 연못인 '궁남지'로 갔다. 7월마다 연꽃축제를 할 만큼 연꽃이 많고 특히 야경이 아름답다는 정보를 가지고 갔으나 연꽃은 이미 다 졌고 날이 저물어 어둠 속에서 규모만 대충 짐작하고 돌아왔다. 연꽃축제 시기에 다시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숙소로 들어갔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금동대향로'의 실물을 보는 날이다. 비 오는 부여의 길과 백마강의 다리를 지나 드디어 '국립부여박물관'에 도착했다. 부여박물관 '본관'을 가는 길에 먼저 '공연장' 건물이 있고 '어린이 박물관' 동이 따로 있다. 공연장과 어린이박물관을 지나 계단을 더 올라가면 부여박물관 본관이 나온다. 건물 앞 넓은 공간에는 아주 커다란 꽃들이 피어 있는 아주 커다란 화분들이 줄지어 있었다. 지구의 꽃이 아닌 것처럼 이상하게 커다랗고 이상하게 예쁜 색깔의 꽃들이었다. 부여는 이렇게 크고 예쁜 꽃들이 피는 곳인가 보다. 드디어 '금동대향로'가 있는 부여박물관 본관에 들어섰다. 입구의 안내판에 '금동대향로'에 대한 소개 영상을 상영하는 시간표가 적혀 있는데 상영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먼저 소개 영상을 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잠시 로비에 앉아서 상영을 기다렸다. 시간이 되니 상영을 알리는 방송 멘트가 박물관 안에 울려 퍼진다. 곧 로비 천장의 빛이 들어오는 부분이 가려지더니 로비 천장이 스크린이 돼 소개 영상이 상영됐다. 금동대향로에 있는 수많은 인물과 동물을 하나하나 실감 나게 보여주고 그 의미를 설명해 줬다. 친절하고 아름다운 소개 영상이었다. 영상이 끝난 후 나는 스마트폰에 국립박물관 앱을 깔고 그중 부여박물관을 연결해서 아이 귀에 이어폰을 꽂아 주고 관람을 시작했다. 유물 앞에 서면 띵동 소리가 나면서 그 유물에 맞는 설명이 들리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인터넷 연결이 불안정한지 자꾸만 끊겨서 오히려 관람에 방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오디오 프로그램을 중지하고 부여박물관의 주요 전시물에 대한 설명 영상을 플레이해서 보게 했다.
우리는 드디어 제2전시실의 금동대향로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전시실 한가운데 금동대향로가 놓여 있다. 금동대향로 실물을 영접하는 순간이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눈의 초점을 금동대향로에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맞춰 나갔다. 그리고 천천히 금동대향로 주위를 돌았다. 금동대향로는 기대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움과 감동을 주었다. 새겨진 모양 하나하나가 너무나 생생하고 정교했다. 악사들의 악기와 동물과 사람의 표정들까지 너무나 생생했다. 그리고 말을 탄 사람, , 낚시하는 사람, 악어, 코끼리, 사람 얼굴을 한 새 등 사람과 동물의 다양한 모습들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향로 하단 용의 발과 발톱에서 느껴지는 금방이라도 뭔가를 움켜쥘 것만 같은 힘과 긴장, 향로 꼭대기 봉황의 한껏 부푼 가슴 부분은 감탄을 자아냈다. 몇 시간이고 이것만 보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금동대향로 하나만으로도 부여를 방문할 차고 넘치는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여기에 데려와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부여박물관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백제의 '문양들'이었다. 백제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벽돌들의 문양은 천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생생해서 금방이라도 돌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이것 역시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벽돌을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 가지고 왔다.
백제 박물관을 실컷 둘러보고 나와서 근처에 있는 '정림사지5층석탑'을 보러 갔다. 부여 곳곳에 부여를 상징하는 것으로 '금동대향로'와 '정림사지5층석탑' 모양이 보인다. 아마 부여 사람들이 부여를 상징하는 두 가지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금동대향로에 대한 감동을 안고 정림사지5층석탑에 도착했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금동대향로를 봤으니 이제 됐다는 마음이 컸다. 표를 끊는데 매표소 직원이 시간이 늦었으니 폐관 시간이 얼마 안 남은 박물관으로 먼저 가라고 했다. 우리는 석탑을 대충 보고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석탑 하나를 설명하는 박물관이라니 별 기대가 안 됐다. 그런데 정림사지박물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정림사지5층석탑을 대면했을 때 그렇게 감동받지 못했을 것이다. 박물관은 내가 보지 못했을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마법을 시현해 주었다. 박물관을 나와 정림사지5층석탑에 조금씩 다가갔다. 천년의 시간을 버티고 있는 단단하고 균형 있는 석탑의 아름다움이 눈에 보였다. 다가가서 보니 그리 크지 않은 석탑의 모습에서 웅장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석탑을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부여의 모든 것이 감동이었다. 어떤 도시 전체에서 이렇게 감동을 받기는 처음이다. 나의 무지가 미안했고 조용히 이 모든 시간과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부여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부여는, 부여의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유물들을 품고 있는 의미와 역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역사에 무지했던 내가 역사를 좋아하는 아이 덕분에 아이의 눈높이로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 간다. 역사뿐만이 아니다. 아이가 태어난 후, 나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아이와 함께 다시 배우고 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나의 처음들, 서툰 시간들, 성장의 과정을 아이와 함께 다시 짚어간다. 내 인생 두 번째의 처음들을 경험하고 있다. 처음 걷고, 처음 뛰고, 말이 트이고, 글자를 배우고,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되고, 좋아하는 것이 생기고... 기억 저편 내가 겪었을 비슷한 시간들을 상상해 본다. 내 인생에서 기억 속 빈 부분이 그렇게 채워지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이 덕분에 부여를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