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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티브스피커 Jan 11. 2022

"'눈다운 눈'이라니요? 그건 도대체 어떤 눈인가요?"

'~답다'에 대해서


'-답다'
1.  일부 명사나 명사구, 또는 어근의 뒤에 붙어, ‘그것이 지니는 성질이나 특성이 있다’의 뜻을 더하여 형용사를 만드는 말.  예문) 꽃답다, 아름답다, 정답다, 참답다.
2. 일부 명사나 명사구 뒤에 붙어, ‘그것의 긍정적인 속성을 충분히 지니다’의 뜻을 더하여 형용사를 만드는 말. 예문) 어른답다, 학생답다, 선생님답다, 경찰답다, 나답다.        
3. 일부 명사나 명사구 뒤에 붙어, ‘~다운’의 꼴로 쓰여, ‘그것의 전형적인 속성을 지니다’의 뜻을 더하여 형용사를 만드는 말.
예문) 그녀는 오랜만에 책다운 책을 읽었다.
       한동안 나는 춤다운 춤을 춰 본 적이 없다.
       그는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출처: 고려대한국어대사전



"눈다운 눈이요? 이해할 수 없어요. 눈다운 눈은 어떤 눈이에요?"


아주 오래전 언젠가 '-답다'에 대한 수업을 할 때였다. '선생님답다' '학생답다' '아이답지 않다' 등의 예문을 들어 이 표현의 의미를 설명하고 나서 일기예보에 많이 쓰이는 '어제는 오랜만에 눈다운 눈이 내렸습니다.'라는 예문을 제시했을 때 한 학생이 매우 미심쩍은 얼굴로 질문을 했다.


한국어에 대한 이해와 습득이 빠른 학생이었는데 이 문법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는 것에 오히려 내가 의아했다. 나는 '-답다'의 의미를 다시 한번 자세하게 설명했다. 학생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같은 설명을 반복하는 게 의미 없을 것 같아서 학생에게 이 표현에 대한 의문을 자세하게 말해 보게 했다.


눈은 여러 가지 종류와 각각의 이름이 있는데 어느 하루 내리는 눈을 보고 그것을 눈을 대표하는 눈이라고 한다는 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눈에 수십 개의 이름을 붙여 준 에스키모는 아니더라도 북유럽 어딘가에서 온 이 학생의 눈과 평생 한국에서만 봐 왔던 내 머릿속 눈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제야 그 학생의 질문이 이해가 됐다.


내 머릿속에서 눈은 양이나 속도, 결정의 크기가 조금씩 다를지언정 그저 하나의 개념일 뿐이었다. 각각에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펑펑 내려서 바닥에 수북이 쌓일 정도의 눈을 보면서 '아~ 오랜만에 눈이라고 할 만한 눈, 눈다운 눈이 내리고 있구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눈에 대한 작은 정보조차 생존이나 삶의 방식과 직결되는, 그래서 눈의 특성에 따른 구분이 우리나라 사람의 배추김치, 깍두기, 동치미만큼이나 분명하게 느껴지는 북유럽 학생에게 다양한 눈의 특성을 모두 삭제한 채 눈의 양만을 기준으로 하나로 뭉뚱그린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한 사회에서 어떤 대상의 존재감의 크기는 어쩌면 그것이 얼마나 세밀하게 구분되는지, 그래서 얼마나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로 가늠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김치를 부르는 이름의 수나 친척을 구분해서 부르는 이름의 수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누군가 설렁탕에 얹어 먹는 칼칼한 깍두기를 두고 '이것이야말로 김치다운 김치지.'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동의할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 사회의 커먼 센스가 될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배추김치, 총각김치, 젓갈을 넣은 김치, 젓갈을 안 넣은 김치, 겉절이, 동치미 등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돌게 하는, 존재감을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이 김치들은 다 어찌하고 깍두기만이 김치다운 김치라고 하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눈이나 김치라고 생각해도 억울할 일인데, 하물며 사람의 표준을 정해서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만이 선생님이고 학생이고 남자라고 한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일까?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를 콕 집어 '사람다운 사람', '남자다운 남자', '학생다운 학생'이라고 하고 그 좁은 바운더리를 빗겨 있는 사람은 '남자답지 않다', '어른답지 않다', '선생님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수긍할 수 있을까?


'-답다'는 특정 집단이 가져야 하는 이상적인 특성이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된 표현이다. 그런 이유로 '-답다'는 그 자체로 표현 대상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  '그 사람은 정말 남자답다.' '너의 옷차림은 학생답지 않은 옷차림이구나' '그런 행동은 너답지 않아.' 일상 대화 속 이런 표현들이 가볍게 건네는 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개인이 공동체의 공유된 기대를 얼마나 잘 구현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일상에서조차 집단의 기대를 벗어나지 말라는 압력을 수시로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답다' 안에 담겨 있는 공유된 기대의 내용이 모호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답다'는 자신의 지극히 주관적인 가치관과 호불호를 밀어붙이려는 사람들의 무기가 되어 주기 일쑤다. '학생'에 대한 이상적인 특성을 언제 누가 어떤 내용으로 합의했나? 같은 시간을 살고 있어도 세대나 경험 등에 따라서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개념이 모두 다를 텐데 그 고갱이를 찾아서 굳이 그것으로 사람들을 평가하려는 노력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전에 내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상사가 나를 불러서 강사면 '강사답게' 옷을 입으라고 한 적이 있다. 나는 도대체 '강사다운 옷차림'이 뭔지 한참 고민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내가 입은 옷은 내 기준으로는 지극히 '강사다운' 옷차림이었기 때문이다. 상사는 자신의 불호를 '-답다' 뒤에 숨김으로써 자신의 지적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했던 것 같다.


또한 '-답다' 안에서는 그 집단에 포함된 개별 존재들의 고유한 특성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큰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도 시간이 갈수록 작은 차이, 소수가 공유하는 특성, 개별자 하나하나를 구별 짓고 이름을 붙여주는 것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내 존재적 특성이 인정되고 존중받는 '우리'여야 기꺼이 그 안으로 들어가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답고 엄마답고 선생님답고 싶지 않다. 그런 칭찬은 사양한다. 나답다는 기대에 갇히고 싶지도 않다. 실체도 알 수 없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헛된 노력을 하기보다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이름을 만들어 가고 싶다. 그 이름이 설사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만큼 길고 복잡할지라도...


눈다운 눈이라니!!

바람에 쓸려 가는 작은 눈 결정체의 반짝임에 이름을 붙여 주지 못해서... 괜스레 미안해지는 겨울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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