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 관심만 많던 머글이 덕후의 길로
어째서 내가 철학 전공을 선택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난다. 다만 나는 세상의 진리와 근본이 궁금했던 것 같다. 철학하면 뭔가 간지나게 파고드는 이미지가 있지 않은가? 세상을 학문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대학에 가면 과학도 복수전공을 할 생각이었다.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던 철부지라 그런지 1학년부터 물리학/미적분학/사회학/종교 등등 다양하게 수업을 들었다. 소위 학점을 잘주는 꿀강을 찾아듣진 않았다. 무조건 재밌어보이는 것만 골라담았다. 근데 1년간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인문사회과목보다는 수학/과학이 더 매력있었다. 그 이유는(이 모든 의견은 주관적입니다.)
1)수학/과학이 더 예측할 수 있는게 많고 정확하다.
2)실험이나 논증이 좀더(돈을 많이 써서)체계적으로 진행된다.
3)일단 나온 결과들이 신기하다.
과학 수업을 듣고 흥미를 느꼈다고 해서, 인문학 전공을 포기할 이유는 없지 않지 않은가? 근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전공으로 문과 수업을 듣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어쨌든 대학은 전문성과 커리어의 첫 스타트이다. 전공의 입장에서 비교적 인문학은 진입장벽이 낮다고 생각한다. 물론 분야에 따라 다르겠으나 나는 커리큘럼만 알고 있다면 비전공자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굳이 수업을 듣고 내가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게다가 철학 전공을 2학년 때 처음 듣고 나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실망했었다. 학부 철학전공은 세계의 근본을 파고든다기 보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았나를 중심으로 공부한다. 그래서 텍스트를 읽는데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철학은 세계를 설명하고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그 동안 보지 못했던 문제를 제기하고 생각해보자는 취지의 학문인 것 같다.
나름 고민 끝에 이과로 옮기기로 했다. 처음엔 수학을 전공하려 했었다. 나름 기초 수학/과학 과목들이 다 좋은 성적이라 자신있었다. 그런데 진짜 수학은 토나온다는 걸 처음 알았다. 수학과의 기본이라는 <해석학>이라는 과목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수강 철회했다. 수학은 외계어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동안 내가 잘했던건 수학이 아니라 계산이라는 걸 깨달았다. 수학은 접기로 했다.
수학에 상처를 입을 무렵 들은 수업이 <현대물리학>이었다. 기억에 남는 건 수업 진도가 다 나가고 종강할 즈음이었다. 교수님께서 고체물리: 초전도체에 대해서 최신의 연구자료를 직접 쉽게 소개해주셨다. 그 수업이 나는 너무 재미있었다. 물질 세계를 기가 막히게 궤뚫어내는 물리로 마음이 확 기울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초전도체는 물리학에서 현재는 많이 연구가 안되는 분야. 교수님한테 제대로 영업 당했던 셈이다)
어쨌든 열심히 알아보고 물리로 전공을 바꾼 뒤 첫 학기, 그 동안 내가 해왔던 것은 물리가 아니라 교양과학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진짜 물리학과 전공과목은 수학에 버금가는 외계어였던 것. 낯선 언어와 쏟아지는 분량, 그리고 엄청난 난이도에 한 학기 내내 고통받았다. 밤 늦도록 실험실에 앉아서 결과를 뽑아내야하는 실험 과목에,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양자역학을 처음 만난 시기였다.
너무 적응하기 힘든 한학기를 보내고, 어려운 전공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당장 휴학을 때렸다. 스타트업 인턴도 해보고, 고시류 시험도 준비해볼까 고민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제대로 물리에 영업당해 있었다. 다른걸 하면서도 생각나는 물리가 재밌었던 것.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고 대학원 인턴을 신청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제일 잘한 결정 중 하나인 것 같다. 인턴을 하면서 대학원생의 생활, 실제 연구되는 방식노가다 및 주제, 연구환경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 나는 전공을 거의 모르고 있단걸 느꼈다. 실제 논문을 읽고,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전공의 기본기가 충실하게 닦여있어야 한다. 나는 그걸 따라가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인턴 경험 이후, 다시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결심했다.
그 이후 나는 1년간 공부를 꽤 열심히 헀다. 동아리도 그만두고, 운동과 공부에 전념했던 1년. 덕분에 전공에 대해서 많이 이해하고 성적도 많이 올랐다. 처음으로 성적 장학금도 받고 상장도 받았다. 이제는 어디가서 물리 학부생이라고 소개하는게 막 부끄럽진 않은 것 같다.
내가 철딱서니가 없고 고집이 세서 그런진 몰라도, 궁금하고 신기한 것만 쫓아서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문과에서 이과로,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는 과정도 결국 다 재미를 쫓아서였다. 항상 재미있는 것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공을 바꾸면서 깨달았지만, 아직 정신을 덜차렸다. 어려움을 조금 넘으면, 또 재밌어지기 때문(...).
아직까지는 이 재미를 따라서 살고싶다. 그래서 대학원/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연구자의 꿈을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