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기 전 책날개의 저자 소개를 읽지 않는다.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책을 읽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 뭐야. 하정우 먹방 저리 가라의 필력. 찰진 에피소드들. 중반 즈음 읽었을 때 책날개로 돌아갔다. <GQ Korea>에서 11년간 음식과 술을 담당하는 피처 에디터. 역시가 역시다.
먼슬리 에세이를 즐긴다.(욕망 시리즈 6부작이다, 매월 1권씩 발간)
01은 물욕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신예희),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의 가져다 쓴 위트 있는 제목에, 간접 소비욕을 마구마구 채워주는 돈 쓰는 기쁨에 관한 책이다.
02는 출세욕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이주윤), 이주윤 작가 글은 괴랄하다.(괴상하고 기상천외하다) 나르시시즘과 자기비판이 혼재된 작가의 글을 읽으며 쓰는 동병상련과 유명해지지 않음에도 계속 써야 하는 운명에 관한 글이 좋았다. 다른 저서를 찾아 읽었다.
그 먼슬리 에세이의 5번째 책이 바로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다.
<"음식이랑 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놀러 다니는 걸 잡지 기사로 만들어요."
그러면 대다수가 좋겠다, 팔자 좋다, 꿈의 직장이다, 나도 그거 잘하는데, 나도 이직하고 싶다는 식의 한결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럼 나는 크게 부인하지 않고 그저 "재밌습니다."라고 답한다.
실제로 그랬다. 늘 재밌었다. 뿌듯한 결과를 만들기 위해 따라붙는 애끓음, 스트레스, 초조함은 당연히 다른 직업군과 비슷하거나 혹은 그보다 좀 더 컸겠지만, 일단 그 달 잡지가 나오고 나면 어쩐지 재밌다는 기분만 남았다. p23>
신의 직장은 이곳이었다. 사실은 이 일 역시 좋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술은 왜 먹는지 모르겠다는 사람이라면 과연 이 일에서 얼마나 한 능률을 뽑아낼 수 있을까. 누군가 부러워할만한 일이면서도, 실제 작가님은 이 일에 프로였다. (좋아하는 것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 순간이 온다. 좋아하는 활동이라도 일로 하면 싫증이 난다. 쓰고 싶은 글을 쓰면 자판에서 손가락이 날아다니지만, 써야 하는 글은 엉덩이만 무겁고 진도는 안 나간다.)
<음식을 주제로 새로운 방식의 콘텐츠를 만들 때 내가 주로 썼던 방법은 '스케일을 늘려보는 것'이었다. 식재료를 잔뜩 공수해 근사한 화보로 만드는 일을 자주 했다. 채소만 40만원어치를 사서 신비한 정원처럼 꾸미고, 일식집 도매상들에게 간곡한 전화를 돌려 실한 고추냉이 뿌리를 구해 나무처럼 연출하기도 했다. 그 주에는 남은 채소를 닥치는 대로 넣어 만든 샐러드로 삼 시 세끼를 났다. 냉장고 문을 열면 온통 채소로 꽉 찬 어두운 동굴 같았다. p27-28>
<스케일을 늘리기 힘들다면 평소 보지 못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도 있다. 광어, 우럭, 도미, 농어의 맛과 특징을 설명해주는 기사를 진행하면서, 이 한 점의 횟감을 사람 얼굴보다 더 크게 확대해 잡지에 실어볼까 생각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회 한 점을 가까이 들여다보니 한 점의 살에 결마다 영롱함이 비치고 보석처럼 다채롭게 빛났다. p29>
아마 이 문구를 보고선 며칠 동안 회가 먹고 싶어, 기어코 점심시간에 뛰어내려 가 바다의 물고기에게 호령할 듯한 (그 이름도) '장보고 횟집'에서 모둠회 중자를 포장해 들고 올라왔다.
사시미를 뜬 회 한점, 영롱함을 느꼈다.
<어젯밤도 참지 못했다. 배달의 민족 어플로 혼술용 참치 1인분을 시켰다. (중략)
물론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해도 되고 그냥 빈속으로 해도 되지만, 그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야식을 먹어야 하는 이유가 논리적으로 늘 우세하다. p53>
우리 모두의 일기를 읽는 듯했다. 박상영 작가의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도 제목처럼 매번 밤이 되면 스스로에게 외우는 주문이었지만, 늘 실패로 끝났다. 다음날은 어김없이 부은 얼굴, 더부룩한 속으로 아침을 맞이하지만, 그 밤에 야식을 주문하는 나는 절대적으로 옳다. 밤의 주인은 허기짐이고 우리는 그 허기짐에 늘 굴복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에게 인류애를 느꼈다.
고루 흥미롭게 읽었지만, 단연코 제일은 '혼밥'에 관한 것이었다.
<아무리 혼밥이라도 누군가의 시선이 필요하다. 집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 끝도 없이 게걸스러워지는 나를 발견한 뒤 내린 결론이다. p77>
<그 누구도 없는, 그야말로 혼자만의 혼밥은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의 은밀한 사생활이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둬왔던 욕망을 폭발시킨다. p79>
이 문장을 뒤이어 이어지는 묘사는 정말 극한직업 '혼밥'코너를 보는 듯하고, 미칠듯한 공감으로 혼웃하며 읽어 나갔다.
야식 후 남은 치킨을 아침부터 개시, 저녁에 술잔을 아침에 살짝 물로 헹궈내 물컵으로 사용, (보통은 설거지가 두렵다) 손바닥만 한 접시에 층층이 밥과 반찬을 아슬아슬하게 쌓아서 먹는 모습이라든가, 아차차 씻어둔 식기가 없으면 숟가락 하나로 밥 반찬을 일사천리로 퍼 먹는(나) 것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슬쩍 밀려오려고 한다(굳이 혼자가 아니라도, 가족이 없는 집에 내 모습을 엿본다).
밥솥 안 눌러 붙은 밥을 기어코 미역국에 말아 어금니 빠진 권투선수마냥 툽툽 하나씩 뱉어가며 힘겹게 식사를 이어간 에피소드에서는, 아하 내가 이 책 리뷰를 꼭 써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했다.(리스펙트)
다만 혼자 지내는 집이란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 팬시한 호텔에서도 (보는 이 없는 프라이빗 공간) 타짜의 정마담 기세로 한쪽 무릎을 세우고 거칠게 식사를 하는 작가의 에피소드는 기승전혼밥의 최강자로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어쩜 이렇게 이야기를 맛깔나게 쓰셨을까. 후반부 본격적으로 애정을 담은 술 이야기에서는 전문성과 개인의 취향이 콜라보되어, 남편이 물 건너 사 온 술 중에 분-명히 위스키도 있을 텐데 하며 의자에 올라서 선반을 뒤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위스키 애호가인 작가님은 잘 때 디퓨저로 위스키 한 잔을 사용했다.(이후 위스키 론칭 행사장에서 만난 조향사분이 인정했다. * "위스키 향이 8시간 정도 지속되니 아주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p149)
'음식과 술'만으로 채운 160 페이지는, 파인 다이닝에 대한 에피소드로 막을 내린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았다.
<"셰프는 식재료를 연구하고 이를 통해 새로움을 만들어낸다는 사명감을 가진 직업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 제시카 코슬로우, 캐주얼 레스토랑 '스퀄' 오너이자 셰프 p165>
좋아하는 사람과 모여서 좋은 음식을 나눠 먹는 즐거움. 그 속의 유쾌한 대화들. 친밀함 모두가 우리가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들이란 것을.
코로나19시대에 살아가며 포장과 혼밥이 대세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우리는 모이는 즐거움,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고 밥을 먹는 것.
자 그럼 일단 파인 다이닝부터 찾아볼까?
Title 이미지출처. Photo by Jasmin Schreiber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