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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오드 Aug 11. 2023

 40살에 가장 먼저 할 일은 셋째 출산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인생이 퍽이나 망했다는 생각을 했다. 


줄곧 아이를 키우면서였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의 물리적 힘듦과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을 때 99%의 확률로 나를 불쌍히 여기는 어른들을 보면서, 아들 둘로 마감되는 내 인생은 망했구나 하는 생각을 당최 떨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둘째는 손에 꼽힐 정도의 극한 아토피로 100일부터 현재 9살 인생까지 하루도 수월한 날이 없었다. 

신기한 경험은 인간은 고생을 하면 할수록 그 일에 대해서 더욱 좋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데 둘째를 키우는 과정 역시 그러한 이론에 딱 들어맞듯이 괴로워죽겠는데도 행복해죽을 것 같은 이상한 상태로 9년의 시간을 살아왔다.


바야흐로 두 아이가 초등학생 그것도 마(魔)의 1학년을 지나서 점차 예측가능한 학령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내 인생에도 가능성이라는 것이 먹구름 사이 비춰드는 햇살처럼 생겨났다. 


아이가 못난 것은 다 엄마 탓이라는 공고한 세상의 편견 속에서 극심한 우울증을 겪고, 다시는 눈뜨고 싶지 않다 하며 잠자리에 드는 날들도 지나 도착한 곳에서는 드디어 선택의 자유라는 것이 생겨났다.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배워도 되고, 모임을 만들고 싶으면 만들어도 되고, 나가서 멍 때리고 싶으면 멍 때릴 수 있는 그런 인간의 기본권이 드디어 복권(復權)된 것이다. 


군대를 다녀온 남학우들은 하나같이 철들어 돌아왔다. 이전과 달라져서 성적도, 취업도, 연애도, 모든 면에서 업그레이드된 인간이 되었다. 군대와 임신출산을 비교하지 마라 하지만 그만한 임팩트를 가진 사건을 찾기는 어렵다. 임신이라는 기쁨 속에서 육아라는 블랙홀로 정신없이 빨려 들어갔었다. 정신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육아 나락 속에서 드디어 지상에 도착. 이곳은 학령기. 아이들이 스스로 간다. 스스로 온다. 아이들의 일과가 만들어지고 그건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욱 공고해진다. '이제 너는 자유다. 단 오전시간까지' 라는 단서가 붙지만, 화장실 갈 때마저 문을 열어놓고 범보의자에 앉힌 아이를 앞에 둬야 할 만큼 자유의 'ㅈ'도 누리지 못했던 한 인간에게 그건 대단한 자유다. 


일단은 재고 따질 것 없이 질러야 했다. 내 몫을 찾기 위해서, 학교를 등록했다. 얼씨구 다시 대학생. 대신 이번에는 학교 이름이 아닌 '증'이 나오는 학교를 택했다. 2년간 수학 후 취득하는 '증'은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가 부여한다. 맨몸으로 사회에 발을 디뎌 봤는데(대형마트/서비스/판매 etc)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간의 공백을 메꿔야 한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게 지금 다니는 학교다. 


아이들 몫, 동반자의 몫, 내 몫의 삼중구도가 형성된 집은 공기부터 다르게 느껴진다. 숨 쉬는 게 편안하다. 들숨날숨이 고르고 아주 안정적인 일상이 형성된다.(공식적으로 내가 부재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큰 뜻 없이 시작한 대학교 생활과 이후에 나오는 '증' 그 정도만으로도 내일이 기대되는 날로 변했다. 주변사람들이 뭐 하냐 물으면 학교에 간다고 대답했다. 새로 배우러 간 탁구장에서도 일하세요?라고 물으면 학교에 다닌다고 대답했다. 10년을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있다는 말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그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있어요라고 시인하는 것 같았다. 모든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로 환원되는 신기한 사회적 언어. 집에서 놀아요.


결혼하고 처음 얻은 집은 단독주택 2층의 방이 2칸, 거실이 하나, 2평보다 작은 화장실이 하나 갖춰진 셋방이었다. 거기서는 아무런 꿈도 꿀 수 없었다. 아이 하나 키우는 것 만해도 벅찬 삶이었다. 동반자는 6시 20분에 나가면 20시 40분에 귀가했다. 그땐 차도 없었다. 맨몸으로 아이를 키운다는 표현이 딱 그때의 삶을 표현한다. 아기띠 하나 메고 못 간 곳이 없다. 둘째라니. 어휴 말도 안 돼. 집도 절도 없는 외벌이 우리가 어떻게 애를 둘이나 키워. 했는데 14개월 터울로 둘째가 들어섰다. 방이 3칸, 화장실이 2개인 두 세대가 사는 빌라로 이사를 했다. 그때 동반자의 이직으로 중고차도 한대 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림살이가 나아진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늘 팍팍하고, 나라는 인적자원을 갈아 넣고, 동반자가 바깥일에 올인을 하면서 굴러가는 그런 삶이었다.


스톱모션의 주인공처럼 반복반복반복반복의 연속 그러는 와중에 조금은 나아간다는 느낌을 받은 게, 올해다. 올해는 아이들이 저학년과 고학년 중간 언저리에 들어섰고, 집의 대출금 끝의 '0'자리가 줄었으며, 3년 된 중고차를 사 몰았던 10년의 세월을 보상하듯 신차를 뽑았다. 이왕 뽑는 거 체급도 올렸다.


좀 나아지는 것 같다 는 희망. 

그와 동시에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아이가 세명인 가정. 동시에 내 인생을 새롭게 리셋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자꾸 충돌했다.


나는 10년 동안 두 아이를 키웠다. 오롯이 스스로 키웠는데 대단히 못 키웠다. 누군가는 그만하면 됐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성이 차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목표를 가장 높은 곳에 두는 스타일이라, 육아를 하면서 자괴감 들지 않을 날이 거의 없었다. 그런 내 앞에 계획이란 것이 하나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38살에(내년) 학사를 졸업하고 취업을 한다. (계약직으로는 자리가 많다) 또는 2년의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공무원 시험에 도전한다. (응시 자격제한이 있다. 2년제든, 4년제든 학부졸업 후 문체부에서 나오는 자격증을 받은 후 응시 가능.) 

직장에 들어갔음 1년을 일하고(39살), 시험에 응시했음 무슨 일이 있어도 합격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40살에 접어든다. 그때는 임신과 출산 육아 사이클에 들어간다. 물론 자연의 섭리에 의해서 이뤄지는 일이기에 하늘의 뜻에 맡긴다. 지금은 동반자와 많이 사랑을 하지만 엄격하게 관리를 한다. 지금은 각자 대학원 졸업, 학부졸업, 동반자는 회사(=커리어)와 부캐(=유튜브)에 올인 중이다. 그렇지만 40은 찾아온다. 우리 인생의 전환점은 임신출산육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꽤나 진지한 통찰 속에서 나온 것인데, 내가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이렇다 하게 출세를 할 확률이나, 대단한 논문을 적어낼 확률이나, (내가 20살에 접어들며 꿈꿨던 미래의 모습) 그 모든 영광들을 이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거 아니냐고?) 군대 전역 후 불나방처럼 공모전, 대외활동, 연애사업, 취준 열정만수르가 되는 이들처럼 나 역시 100%이었던 엄마지분을 40%으로 줄이고 사회의 떳떳한 구성원이 되겠다 하고 가열차게 문밖으로 나섰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엄마 역할이었음을 여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신입생으로 입학한 (재취업을 위한/혹은 이직을 위한) 30대, 40대 여성들은 가정이 있었고, 수업 중간중간 울리는 전화 속에서 애타게 엄마를 찾는 아이들의 메시지를 받고 나면 대부분은 눈빛이 흔들렸고, 중간 쉬는 시간에는 한숨 + 내가 이거 해서 뭐 대단한 걸 이루겠다고 이렇게 가족을 내버려두고 여기 나와있나 하는 자괴감을 나눴다. 나 역시 그 마음이 어떤 것이지 너무 잘 알았다. 학교 다니게 되면 급하면 배달도 시키고, 반찬도 좀 사다 넣고 할게라고 공언했던 것이 무색하게 결코 단 하루도 주방을 내팽개치고 나온 적은 없었다. 방금 전까지 가스불 앞에서 프라이팬을 앞뒤로 열심히 휘젓다가, 시간 맞춰 뛰어나와 지하철에 올라타는 그 마음. 옷에는 음식냄새가 배였을 망정 마음만은 떳떳했던 그 시간들.


당최 요행으로는 해낼 수가 없는 것이, 가정일(chore) 임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앞으로 누릴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건 무엇일까.' 생각을 해보았다.


악보 끝에 붙은 도돌이표 기호처럼, 엄마는 결국 가정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한 번이라도 당신이 엄마였다면 당신은 결코 가정을 두 번째나 세 번째의 일로 둘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래도.

일단 직업란에 무직이라 적는 것도, 주부라 적는 것도 너무 싫은 사람이기에 직업적 성취를 해야겠다. 이일 저 일에 떠밀려 다니는 학교일지라도 내일이 기대가 되잖아. 그것만으로도 학교는 삶의 큰 축을 이룬다. 됐다.


다시금 원론적으로 인생의 행복에 대해서 논할 차례인데, 거기서 등장하는 게 바로 나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니 여자였다)에게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은 무엇인가? 쇼핑? 명품? 자유가 넘치는 시간? 한도 없는 카드? 새 차? 이걸 다 누리지도 못했지만 경험해보지 않아도 여기서 나오는 행복의 지속도를 안다. 강렬하지만 빨리 꺼져버리는 것들. 효과가 휘발되는 것들. 그런 것보다도 좀 더 영속적인 것을 원한다. 이를테면 끝없이 솟아나는 사랑의 감정. 바라는 것 없는 사랑(=조건 없는 사랑). 나는 메마른 타입의 인간인데, 내 속에도 폭신폭신하고, 보드랍고, 달달하고,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은 행동들과, 돌봄을 통해 전해주고 싶은 사랑이 있음을 알았다. 변덕이 심한 본인에게 이토록 오래도록 지속되는 감정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주위를 살펴보니 아이들이 커가면서 그것을 나눌 기회도 점점 줄어듦을 알았다. 고등학생 자녀가 있는 다둥이 집은 고등학생 자녀를 위해 방이 서로서로 독립된 객실을 고른다고 한다. 혹은 집에 그냥 있어도 되냐? 는 (여행준비에 한껏 공을 들인) 엄마 아빠의 속이 뒤집어지는 의견을 내기도 하는 등, 고학년으로 접어드는 것은 개인플레이가 늘어나면서 그것을 점차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 우리는 이렇게 서로 멀어지는구나. 너는 너의 인생을 찾아가겠지. 더 이상 나의 도움이 필요 없어지겠지. 너는 떠나가겠지.


그런 에피소드들을 나누면서,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시간이 얼마나 유한한지 깨닫게 되었다.


늘 아기 같던 둘째가 매주 스스로의 계획대로 학습을 하고 준비를 해서 선생님과 1대 1로 화상수업을 하고(이게 될까? 싶은데 잘 되어서 벌써 1년째 이어지고 있다), 궁금한 게 생기면 바로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물어보고(둘째가 방에서 누군가랑 통화하고 있다. 알고 보니 선생님...), 어느새 훌쩍 커버려 형아의 래쉬가드를 물려받아 입고 야외 풀장에서 잠수해 앞으로 나아가보겠다고 팔을 허우적거리는 모습들은 낯설고 대견하고의 연속이다. 아 아이가 저렇게 커가고 있구나. 나는 아직도 둘째를 보면 오구 귀여워하면서 볼도 꼬집어 주고, 엉덩이도 두들겨 주고, 얼굴이 내 배에 파묻히도록 꼬옥 안아주곤 하는데, 그마저도 점점 끝나가고 있음을,


이제는 알았다.


그래서 3년 후에 도달할 40살의 목표는 임신출산육아가 가장 우선이다. (그전에 앞서 본문에 적은 과업들을 최대한 달성해야 한다) 나는 다시금 행복을 반복하고 싶다. 내가 했던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모두 다 끌어안고 동반자를 덜 미워하며 덜 원망하고, 아이를 너그럽게 이해하고, 바다 같은 마음을 가진 엄마가 다시금 되어보고 싶다. 


양자경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더 유명해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면 멀티유니버스가 등장한다. 극 중 양자경의 남편 웨이먼드 왕(키호이콴)이 했던 말 중에서 가장 가슴에 박혔던 것은, "지금 당신은 가장 안 된(be not good at) 자신이야."라는 말처럼 지금의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덜 된, 못 된, 못 이룬 나일지도 모른다. 그런 내게 미래를 결정할 키(rudder)가 주어진다면, 가장 능력 없는 본인이라 하더라도 멀티유니버스 중에서 가장 행복한 내가 되는 방법을 택하고 싶다. 


그게 바로 내가 40살의 인생목표는 셋째 임신출산육아라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운 이유다.



"그런데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무엇이든 너무 못하니까"


-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웨이먼드의 대사 중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장면 중 - 돌멩이가 된 딸과 엄마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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