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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오드 Dec 12. 2020

충효일기

아이 학교 준비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충효일기장 1권 준비해주세요.>


충효라니...

이 시대의 충과 효는 전래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것 아닌가? 탄식하며 문구점에 일기장을 사러 갔다.

파란색 표지와 초록색 표지로, 저학년용은 10칸짜리 일기장이었고, 고학년용은 줄로 된 일기장이었다.

고학년용이 있다는 것은 고학년 역시 충효일기를 쓴다는 것인데...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데, 아직도 충효일기장이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방학 때 쓰던 그림일기에 비해 분량이 확 늘어난 충효일기는 아이에게 꽤나 큰 부담으로 작용했지만,

선생님이 내어주신 가이드라인에 따라,

1. 아이가 한글이 서툴 경우 아이가 말한 내용을 부모님이 적고 그것을 아이가 다시 일기장에 적는 방식으로

2. 아이가 한글을 스스로 써나갈 수 있다면, 쓰다가 맞춤법이 틀려도 고치지 말고 그대로 쓰게 해 주세요 라는 조언에 따라 일기를 써나갔다.


매번 <ㅣ>와 <ㅏ>를 바꿔적으며, <기찬 딸>이라는 책 제목을 <가친 딸>이라고 읽는 걸 보며 저건 숙명이구나 했고,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이 아닐까 싶은 <재미있었다>는 늘 <제미있었다>로 적는 걸 보며 아예 이 문장을 외우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주말 김장을 하러 본가에 다녀왔는데, 김장보다도 더 큰 수확은 나의 초등학교 6년간 일기장이 1층 다락에 그대로 있다는 소식이었다.


결혼을 하며 침대 밑 서랍에 있던 뭉치의 일기장은 그대로 어디론가 치워졌겠거니 했는데, 침대를 정리하며 서랍 속 일기장은 다락에 챙겨뒀다는 것이었다.(엄마 고마워!)


어제 하교한 첫째를 데리고 본가에 일기장을 가지러 갔다.

정말 순서도 그대로 1학년 3반, 2학년 2반부터 6학년 3반이라고 적힌 일기장이 고스란히 세월을 품고 있었다.


첫째가 한 권을 들고 읽더니, <엄마도 제미있었다 라고 적었는데요?> 라고 한다.

나의 1학년 충효일기에는 그렇게 <제미있었다> 라는 문장으로 마무리한 날들이 많았다.


꽃게가 새끼 꽃게에게 걸음을 가르치면서 <아니 옆으로 걷지 말고 바로 걸으란 말이야 이렇게~ >

하면서 옆으로 걷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꽃게 어미처럼 <제미있었다가 아니라 재미있었다고 적어야지> 하면서 실은 그 시절 그렇게 <제미있었다>라고 적었던 아이였던 것이다.


최초의 글쓰기의 흔적을 발견하곤 쑥스러웠다.

그래도 일기장의 분량을 보니 부지런하게 적었, 싶고 그 시절 무엇이든 일기장에 써 내려갔던 내가 반가웠다.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확인싸인과 함께 써주시던 선생님의 짧은 메세지들, 내 글의 첫 독자이기도 했던 선생님의 메세지를 보려고 늘 서둘러 일기장을 펼쳤었다(좌). 아이의 담임선생님 메세지도 반갑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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