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오드 Dec 25. 2020

세입자를 만나기 두려웠다

오피스텔의 세입자는 외제차를 끌고 와서 여권을 신분증으로 내밀었다

자가, 임대업, 오피스텔 단어와는 무관하게 살아온 내가 28살에 첫 임대인이 되었다.


부동산에는 능통한 시어머님이 짜 놓은 큰 그림에 내가 주인공인 격이었는데, 어쨌든 임대인이 되면서 직접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세입자를 구해서 계약을 성사하는 것이었다.


부동산 몇 군데에 내놓은 게 연락이 와서 모월 모일 계약을 하게 되었다. 신혼 때 살던 집도 전셋집이었고, 어릴 적부터 살던 집은 태어날 때부터 할아버지가 사주신 집이라 부동산 계약이라고는 생활법률 때 들었던 갑구, 을구 밖에 모르는 내가 부동산에 계약을 하러 가는 것은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 당시 첫째는 돌도 지나지 않아기고, 나는 사회 초년생의 티도 벗지 못한, 그야말로 초짜 중의 초짜. 아기띠를 매고 있는 내 모습은 세상 물정 모르는 새댁, 딱 그 정도였다.


어쨌든 부동산에서 공인중개사 직원을 앉혀놓고 계약서는 같이 쓰는 거니 자신 있게 가보자 싶어 남편과 서류, 도장 등을 챙겨 나섰다.


그 많은 부동산 사무실들은 대체 무얼 하며 돈을 버나 싶었는데, 이런 계약서를 적으면(월세 임대차 case) 보증금과 월세를 계산해 0.4%를 수수료(VAT 별도)로 받으니, 와 과연 앉아서 돈을 버는구나, 싶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먼저 도착한 우리는 초연한 척, 부동산 사무실 안 소파에 어정쩡하게 앉아 연신 입구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10여분 지났나 싶을 때, 아우디 A6가 한대 미끄러지듯이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나오는 차주는 우리와 계약하기로 한 세입자였는데, 알 수 없는 아우라에 내가 먼저 문을 열어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라며 들어오는데, 문이 열린 찰나에 세입자의 차 번호판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하, 허, 호가 들어간 넘버인 보려고.

<렌트아니네>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근이 직장이라고 말하는 세입자는 집에 있을 시간은 별로 없을 것 같다며, 위치가 맘에 들어서 계약하고 싶다고 우리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네, 새집이라서 손 볼 건 없을 텐데. 혹시 지내시다가 이상 있으면 연락 주심 되고요> 

그러면서 중개 직원이 신분증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편은 운전면허증을 꺼냈고, 세입자는 클러치백에서 초록색 여권을 꺼낸다.

규정 신분증으로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공무원증, 장애인등록증, 국가유공자증 등 모두 인정이 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막상 상대방이 내민 여권은 그것이 증명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 세입자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여권을 신분증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구나. 많겠지. 국내에서 내가 마주한 게 처음이라 그렇지.)


2000-80인  집. 계약금은 보증금의 10%를 책정. 그래서 오늘계약금 200을 먼저 받고, 이사 들어오는 날, 우리는 키를 넘겨주고(혹은 번호키를 알려준다) 나머지 잔금을 받는다.


나는 여권 속의 이름이 어쩐지 소설 속 인물의 이름과도 같다고 느꼈다. 흔한데, 일상에서는 잘 부르기 힘든 이름. 그와 마지막 피날레는 그가 건넨 계약금이었다. <수표도 괜찮죠?> 하며 건넨 두 장의 백만 원권 수표.


그리고 계약서에 각자 도장을, 싸인을 날인했다.


계약서와 서류를 챙겨서 사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아우디 A6가 먼저 사무실 앞에서 떠나고, 우리는 지하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방에 넣었던 백만 원권 수표를 꺼내보았다. 수표 앞면에 발행된 은행을 보니, 두 군데 다 장소가 다르다. 한 장은 시청 옆 국민은행, 나머지 한 장은 낯선 지역의 신한은행 발행 수표다.


나는 남편을 바라보며 말한다.

<우리 세입자, 뭐하는 사람일까?>


보통 부동산 계약은 이렇게 하는 건가. 계약서를 쓰면서 집주인으로서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말했지만, 정말 연락이 올까 봐 그게 좀 두려웠다.


나랑은 다른 세상에 속한 그녀를 나 혼자서 마주해야 할까 봐 그게 두려웠다.

내가 자기가 사는 세상을 1도 상상하지 못하는 여자라는 걸 알아차릴까 봐 두려웠다.



작가의 이전글 2021 다이어리 첫 장에 적은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