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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쌤 Dec 26. 2017

면접열차

퇴사 후 여행


입사 면접 제안이 들어왔다.

아내의 할아버지(妻祖父)의 1주기 기일이라

충청도에 있던 차였다.


원래는 지방에 내려간 김에, 아내와 같이

평소에 못가 본 남도까지 여행을 하고 돌아올 셈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부르심'에 냉큼 마음을 고쳐먹고,

부랴부랴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참으로 '을'다운 비굴함이 돋보이는 찰나였다.


빠르지도 않은 덜컹덜컹 무궁화호... 긴 시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고마운 공간이었다.


8월초 무더위중 시원하게 소나기가 내리던 날이었다.

평소에 자주 입지도 않는 양복차림이 좀 불편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뭔 대수랴...

빠르지도 않은 덜컹덜컹 무궁화호를 타고 서울을 오가면서,

나는 그 긴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걱정을, 반성을 할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 안된 면접 이야기다.


면접을 본 회사는 강남에 있는 중견기업이었다.

대기실에서 잠깐 기다리는 동안, 사내 방송이 나오는 모니터를 보니

젊은 사람들 위주로 구성된 가족적인 분위기의 벤처임에 틀림 없었다.


내가 조직관리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렇게 분위기 좋은 회사의 강점은...

일이 많아서 야근을 하더라도,

클라이언트에게 욕을 먹더라도,

어깨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함께 으쌰으쌰 격려해주면서

같이 버텨내고 또 같이 성장해간다는 점이다.


대표님과 임원들을 만나 얘길 나눠보니

실로 부러울만큼 좋은 분위기의 회사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내 면접태도는 한마디로 오버였다.


면접중 받은 질문은 꽤나 다양했고,

나는 장시간을...

몹시 당황하여,

몹시 과장된 말투와 행동으로,

몹시 어리숙하게 대처하다 나왔던 것 같다.


그 중에 특히,

"직원중에 하나가 일은 잘 하는데, 부하 직원들이 그를 못견뎌한다.

직속 상사로서 그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질문이 있었는데...

나는

"기회를 몇 번 주겠지만, 본인이 끝내 고치지 못한다면...

전체를 위해 내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면접장을 나와서 30분이 채 지나지 않는 동안,

나는 내 대답이 틀렸음을,

또한 내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은 급속히 '홍시'가 되어가고,

목구멍이 컥컥 막혀와서...

근처 카페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들이켰다.


그 회사의 대표님이 뽑으려고 했던 사람은

일머리보다, 그동안의 경력과 성과보다,

직원들과 잘 소통하고,

그들을 잘 다독여서 함께 갈 수 있는

중간관리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회사를 다니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일이 좋거나, 돈이 만족스럽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좋아서다.


일보다 돈보다 사람이다.

라고 평소에도 주장했던 나였다.


그런데...

면접에서 내가 내뱉은 말은 나조차도 몹시 실망스러웠다.

굴러온 돌일 뿐인데 누가 누구를 내보낸단 말인가...

좋은 상사라면, 어떻게든 끌어안아야 했다.

함께 가자고 얘기했어야 했다.


게다가

평소보다 '당당하게 보이고 싶은 욕심'이 지나쳐,

잔뜩 '허세'와 '거드름'을 피우고 나와버렸다.

면접이란걸 너무 오랜만에 봤나보다.

가뜩이나 더운 여름날, 얼굴에 열이 가시지 않아서,

지하철 냉방기 밑에 서서 한참 천장을 바라보았다.


뭘 어쩌랴! 다 끝났는데...


빠르지도 않은 덜컹덜컹 장항선 무궁화호를 타고

그 긴 시간동안 머릿속에 떠오른 오만가지의 '만약에' 를 하나씩 지워가며,  

나는 다시 시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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