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이 있는 뀌년 해변으로 가요

처음 만나는 뀌년(Quy Nhơn)_ 01

by Jean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러간 걸까. 이제 웬만한 일들은 ’ 10년 전에‘, 20년 전에’로 기억하는 나이가 되었다. 냐짱에 마지막으로 왔던 것도 어느새 십 년이 훨씬 넘었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온 냐짱은 더 유명해지고 화려해져 있다. 그런 냐짱을 꼼꼼하게 둘러보고도 싶었지만 내 마음은 이미 다음 도시에 가 있었다. 2001년부터 베트남을 다녔으면서도 아직 못 가본 도시 뀌년. 그곳으로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었다. 냐짱에서 나흘을 보내는 게 원래 계획이었지만 나는 이틀 만에 짐을 꾸렸다. 손에는 메모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냐짱에서 묵었던 호텔에 뀌년이 고향인 직원이 있었는데 그녀가 예쁜 글씨로 써주었다. 뀌년에서 꼭 먹어야 할 음식 세 가지! 나는 메모를 책갈피에 잘 접어 넣고 드디어 뀌년으로 향했다.


뀌년이 고향인 직원이 써 준 세 가지 음식 이름


냐짱에서 뀌년까지는 200킬로미터쯤. 도로가 해변을 따라 이어져 냐짱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바다를 오른편에 두고 달리는 호사를 누린다. 해무가 낀 바다와 수평선 위의 배들과 양식하는 풍경들, 낯설면서도 또 왠지 낯익은 작은 동네들이 번갈아 나타나니 가는 내내 눈을 뗄 수가 없다. 며칠 강행군이 이어져 자꾸 눈꺼풀이 내려앉는데도 나는 혹여 놓치는 장면이 있을까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4시간을 달렸다. 일찍 출발한 덕에 한낮에 뀌년에 도착했다. 도로가 널찍하고 반듯해서 그런가 한산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날씨는 뜨거운데도 뭔가 시원한 느낌이 든다. 처음 만난 뀌년의 첫인상은 완전 합격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해변 확인이 남았다. 요즘 베트남 사람들에게 새로운 바다 여행지로 급부상했다는 소문을 들은 지라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한산한 뀌년 거리
뀌년의 골목 풍경


바다는 숙소 가까이에 있었다. 10분쯤 걸어가자 넓은 광장(응우엔신삭 공원. 응우엔신삭은 호찌민의 아버지 이름이다)이 나타났고, 길 하나를 건너니 바로 바다다. 큰 포물선을 그리고 있는 해변이 길게 펼쳐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좀 있어서 그런 건지 바다에 나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바다만이 아니다. 모래사장도 텅 비었다. 해수욕장인데 일광욕을 즐기는 관광객도, 그 흔한 비치파라솔도 없다. 냐짱의 해변 풍경과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우리는 일단 해변에서 나왔다. 그렇게 뀌년에서의 첫날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바다로 갔다. 아, 이게 같은 장소인 게 맞나. 어제 오후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고요하게 물결치고 있는 얌전한 바다. 해변 공원에서 들려오는 새들 소리가 물가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너무 잔잔해 바다가 아주 거대한 수영장 같다. 만약 어제 오후의 바다를 보고 실망해서 떠났다면 뀌년의 바다는 수영하기 힘들어, 수영이 목적이면 가지 마,라고 했을 텐데 큰일 날뻔했다. 게다가 있다! 사람이! 그것도 많이! 해변이 시끌시끌하다. 아침 수영을 즐기러 나온 뀌년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맞춰 입고 와 포즈를 취하며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는 베트남 관광객들의 명랑하고 쾌활한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아침 여덟 시경인데 벌써 해수욕을 다 끝내고 젖은 몸으로 호텔로 돌아가는 사람도 보인다. 태양을 피하는 데 선수인 베트남 여인들답다. 수영마저도 해가 이글거리기 전에 즐기고 끝낸다. 아직 한창 수영중인 이들도 있다. 바다 멀리까지 거침없이 물살을 가르며 헤엄쳐 나가는 중년, 노년의 남성 '스위머'들이다. 바다와 함께 살아온 이들의 수영 실력에 감탄하며 나도 얼른 바다로 뛰어들 준비를 한다. 파라솔이 없으니 모래사장에 짐을 놓고 들어간다. 아주 맑고 투명한 바다는 아니지만 바닷물의 촉감이 그저 그만이었다. 마치 실크처럼 몸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바다에 누워 먼 산들과 태양과 지평선 위의 배들과 도시의 광장을 바라보니 여행의 피로는 물론이고 온갖 시름들이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렇게 실컷 뀌년의 아침 바다에 폭 안겨 있다가 밖으로 나오는데 저 멀리 수건으로 몸을 닦는 듯한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해변 카페로 들어가려고 수돗가에서 대강 물을 끼얹은 건가 생각하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앗, 그런데 수도가 아니다. 가까이 가보니 생뚱맞게도 우물이다. 깊고 검은 물이 출렁인다. 바다로 들어갈 때는 전혀 안 보였는데 보도 아래쪽에 오래된 우물이 숨어 있었다. 할아버지도 이 우물물로 몸을 씻은 거였다. 두레박 같은 게 있으려나 살펴보니 저쪽 관목 위에 진짜 두레박이 놓여있다. 아, 이걸 쓰면 되나 보다, 하고 나는 플라스틱 통에 구멍을 내서 밧줄을 길게 묶어 만든 재활용 두레박을 우물에 던졌다.(두레박을 던질 때는 물을 뜨는 입구로 떨어뜨려야 한다. 바닥으로 떨어지면 물은 안 퍼지고 둥둥 떠있기만 한다.) 낑낑 물을 끌어올려 몸에 부었다. 아, 차가워,라는 소리가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어라, 물이 따뜻하다. 물속에 오래 있다가 나와서 그렇게 느껴진 것이려나. 아무튼 그렇게 신나게 짠기를 가셔 내고 또 한 번 물을 뜨려고 두레박을 내린 순간 어디선가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쪽에서 옷을 입던 할아버지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불같이 화를 내신다. 본인의 두레박을 말도 없이 썼다고 말이다. 나는 얼른 사과를 드리고 그 자리를 빠져나와 카페로 들어갔다. 혼줄은 났지만 바닷물을 씻어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마시는 까페쓰어농은 정말 천국의 맛이다. 달콤한 커피를 마시는 동안 열대의 바람이 몸의 물기를 뽀송하게 말려 주었다.


다음날은 토요일. 아침 해변은 어제보다 훨씬 더 붐볐는데 그 어디보다 복작복작한 곳은 우물가다. 바다 수영을 그 특별한 우물 샤워 때문에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몰려있는 사람들 모습에 자꾸 웃음이 난다. 재미있는 건 어제의 할아버지처럼 모두 각자의 두레박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고 보니 모래사장에 벗어둔 옷들 옆에 작은 두레박이 꼭 함께 놓여있다. 여기도. 저기도. 플라스틱 통의 모양도 색깔도 다 다른 걸로 봐서 가게에서 파는 게 아니다. 다들 셀프 제조한 저마다의 두레박을 들고 온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 뀌년에 다시 와 오래 머물게 된다면 두레박부터 준비해야겠다. 나의 두레박을 들고 바다로 출근하는 아침이라니, 아, 생각만 해도 설렌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라는 <어린 왕자>의 구절을 기억한다. 어린 왕자와 조종사는 결국 도르래와 두레박이 놓여 있는 우물을 발견한다. 아무래도 뀌년의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도 우물이 있어서인 것 같다. 우물이 숨겨져 있는 아름다운 뀌년 해변으로 가자. 단, 두레박은 각자 가져가야 한다.


뀌년 카페 거리의 토요일 풍경
어느 카페 벽에 그려져 있던 뀌년의 유명한 것들



PS. 냐짱 호텔 직원이 써준 메모에 등장하는 맛있는 뀌년 음식 탐방기는 다음 회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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