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주 함덕에서 선흘로 가는 버스를 탔다.
먼물깍 습지가 있는 동백동산도 산책하고
마을 안 선흘그림작업장에도 가보고,
그렇게 선흘에서 한나절 보내고 오자고
나선 길이었다.
마을에는 할머니 화가들이 사신다.
자그마치 평균 연령 87세의 화가들.
작업장에 가면 그분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단다.
잘하면 거기 나오셔서 그림 그리시는 모습도.
함덕에서 출발한 버스는 두세 정거장쯤 지나더니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풍경이 금세 달라진다.
여행지에서 현지인들의 삶의 공간으로
순간이동한 것 같다.
상점들은 사라지고 띄엄띄엄 집들만 보인다.
귤이며 무와 배추를 심은 밭에는 오전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다.
어느 집 마당 한 켠에 놓아둔 상자들에는
갓 수확한 노란 귤이 가득 담겨
사랑스럽게 반짝인다.
유명한 여행지가 아니라 그런지
선흘 가는 버스 안은 한산하다.
몇 사람이 타고 내렸고
친구와 나, 그리고 우리 뒤쪽으로
할머니 한 분만 남았다.
할머니가 전화를 받는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통화를 하시는데도
버스 안이 조용해서 얘기가 다 들려온다.
병원을 다녀오셨나 보다.
할머니는 당신의 몸 상태와
요즘 소식들을 전하신다.
전화를 건 사람이 살뜰히 안부를 묻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할머니의 대답 안에
누군가 나를 생각하고 챙기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 묻어났다.
제주 사투리가 신기하고도 정겨워
실례인 줄 알면서도 자꾸 귀를 쫑긋 세운다.
사투리를 들으며 보는 제주 마을 풍경,
왠지 내가 제주 사람이 된 것만 같다.
그때,
전화가 마무리되는 것 같더니
갑자기 할머니가 반색을 하신다.
"온다고? 시간 되나?"
전화를 건 사람이 할머니 집에
들르겠다고 한 모양이다.
안 바쁘냐? 주소 알지? 찍어놨지?
잘 와라, 이따 보자, 하시더니
갑자기 툭- 고백을 하신다.
"나는 요즘 니가 금 같다."
아, 금 같은 사람이라니.
당신이 내게 정말 소중하다는 말을
그렇게 멋지게 전하셨다.
우리의 말은 마음을 얼마큼 전달할 수 있을까.
내 표현은 늘 모자라고 어긋날 때가 많은데
오늘 할머니의 말에는 고마운 마음이,
당신의 진심이 온전히 다 담긴 것 같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를 쳐다보았다.
친구도 그 말을 들었나 보다. 싱긋 웃고 있다.
우리도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그런 고백을 받은 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보나마다 황금빛으로 물들었을 게다.
우리는 할머니보다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동백공원은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았다.
아침 숲길은 상쾌했고 귀한 생물들이 산다는
먼물깍 습지는 고요했다.
선흘그림작업장에도 갔다.
무화과할망, 초록할망, 무지개할망,
신나는할망, 우라차차할망...
할망작가님들의 지나온 삶이 고스란히 담긴
그림들은 금처럼 보였다.
지금쯤 버스 할머니는
금 같은 그 사람을 만났으려나.
오늘은 온통 세상이 금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