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 5분에 출발한다는 기차는 2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나는 느긋하기만 하다. 나무 벤치에 앉아 등받이에 한 팔을 올리고 기차가 오는 먼 곳을 여유롭게 응시한다. 평온하게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현지인들처럼 말이다.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하며 안달복달, 혼자만 일어났다 앉았다, 역사로 들어갔다 플랫폼으로 나왔다 했던 예전의 내가 아니다. 연착마저도 이 반나절 기차 여행의 묘미인 걸 이제는 아니까.
여기는 태국 남부의 소도시 뜨랑(Trang)의 기차역. 나는 지금 깐땅(Kan Tang)역으로 간다. 이 번이 세 번째 가는 길이다.
오늘도 기차는 30분 늦게 천천히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좀 늦었지? 하며 너스레를 떨면서 등장하는 사람 같아 왠지 웃음이 난다. 깐땅행 표를 끊은 사람들이 기차에 오른다. 하루에 한 번 깐땅으로 가는 기차인데 승객은 많지 않다. 방콕에서 출발한 기차는 이곳까지 오면서 사람들을 거의 내려놓고 이제 종점인 깐땅을 향한다. 내가 탄 칸에는 나를 포함해 세 사람뿐. 모두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저마다 창밖 풍경을 감상할 가장 좋은 자리를 찾아서.
천정에 선풍기가 있지만 왠지 기능을 위한 게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자린고비가 매달아 두고 쳐다보는 굴비처럼 그저 눈으로 보고 위안을 삼는 용도인가 싶을 정도로 낡은 선풍기는 칙칙 칙칙 기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탈탈탈 탈탈탈 보란 듯이 잘도 돌아간다.
나는 창문 유리도 햇빛을 막는 덮개도 활짝 열었다. 한낮의 더운 바람이 훅 들어온다. 오랜 시간 가야 한다면 힘들겠지만 깐땅역까지는 20분. 열대의 뜨거운 햇살과 바람마저도 기꺼이 반길 수 있는 시간이다.
기차는 금세 뜨랑 시내를 벗어난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태국의 아름답고 한가로운 시골 풍경을 20분 안에 집약적으로 보여주기로 작정한 듯 기차는 달리며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과 야자나무와 고무나무 숲과 시골집들을 창으로 흘려보낸다. 시속 50킬로미터쯤, 또 어떤 구간은 더 느리게 달리는 완행열차. 덜컹덜컹 덜컹덜컹 마음도 그 속도에 맞춰 편안한 리듬을 탄다.
그렇게 20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1912년 건축한, 100년이 넘은 역사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안다만해의 마지막 기차역, 깐땅역에 도착했다.
겨자색에 가까운 진한 노랑 페인트를 칠한 역사. 나무로 지은 역이 100년이 넘도록 남아 있다니. 여전히 오늘처럼 기차가 서고 표를 사서 어디론가로 떠날 수 있다니. 살아있는 박물관 같아 신기하기만 하다. 지나간 시간들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 여기저기 놓아둔 옛 물건들, 거대한 저울이며 칠하고 또 칠한 페인트의 더께가 얼마나 될까 싶은 나무 의자. 나는 철로를 향해 놓인 의자에 잠시 앉았다. 시간 여행자가 된 듯한 기분인데 기차는 벌써 돌아갈 차비를 한다. 열차 맨 앞 기관실 칸을 분리하고 일등석 칸을 맨 앞으로 돌리는 풍경이 오히려 비현실 같다.
역사에 딸린 건물 한 채는 카페가 되었다. 이름마저도 사랑스러운 ‘러브 스테이션’. ‘사랑역’을 배경으로 사람들은 서로 사진을 찍어준다. 모두 웃기로 작정하고 온 것처럼 웃음을 자주 터뜨린다.
역사를 나가기 전, 뜨랑으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미리 끊어둔다. 기차 시간은 2시 15분. 왠지 더 먼 과거로 가는 표를 팔 것 같은 역무원실을 한참 들여다보다 밖으로 나간다.
연착으로 30분을 까먹었으니 깐땅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다. 나는 짧은 동네 산책을 나선다. 특별한 게 없어 더 홀가분하고 즐거운 산책길. 뜨랑보다 더 한산한 거리를 천천히 걸어본다. 팔자 좋게 늘어진 고양이들을 많이 봐왔지만 여기 깐땅의 고양이가 최고다. 관절을 저렇게까지 꺾고 푹 잠들다니 혹시 죽은 건 아닐까 싶어 한참 쳐다본다. 다행히 살짝 움직이는 걸 확인, 안심하고 다시 또 걷는다. 역 근처가 올드타운이라 옛날 건물들을 보는 재미도 있다. 1944년에 지어졌다는 호텔도 예쁘게 리모델링을 하고 손님을 맞는 모양이다. 미리 알았다면 하룻밤을 묵을 수 있게 계획을 바꿔 봤을 텐데 아쉬웠다.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으려나. 미래의 어느 날을 기약하며 나는 역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남은 삼십 분 정도의 시간은 러브 스테이션 카페에서 보내는 것이 이 여행의 마지막 코스다. 깐땅역의 색깔과 똑같은 색의 케이크와 커피 한 잔이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 준다.
이제 정말 돌아갈 시간이다. 역 앞에서 파는 요상한 장난감을 하나 샀다. 돌리기만 하면 꽥꽥 재미있는 소리를 내는 옛날 장난감이다. 1912년에 지어진 역이 있다고 말하면 안 믿을지도 모를 조카에게 ‘증거’로 보여줄 테다.
기차에 오른다. 이번에는 올 때 앉았던 자리 반대편에 앉았다. 올 때 보지 못한 풍경이 또 조금 새롭다. 창문을 열고 달리는 이 기차를 언제까지 탈 수 있으려나. 깐땅역이 있는 한 달려주겠지? 100년도 거뜬히 견뎠으니 다시 100년도 문제없을 것 같은 아름다운 역에 언제까지나 창문 활짝 열고 덜컹이며 달려 도착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나는 뜨랑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완벽한 여행도 드물지 않나 생각하며. 100년 전으로 훌쩍 데려다주는 마법 같은 루트, 목적지까지 닿는 데 걸리는 20분이라는 짧은 시간, 오고 가는 길의 멋진 풍광, 단 5밧(우리 돈 250원 정도)의 저렴한 기찻삯까지 모두 갖췄다.
가끔 어떤 여행이 멋진 여행일까 생각해 본다. 여행은 늘 멀리 떠남을 전제로 했던 내게 깐땅역 여행이 가르쳐주었다. 가까운 곳으로 훌쩍 떠나는 부담 없는 반나절 소풍도 얼마나 멋진가를.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단편소설처럼 말이다.
# 여행 정보 :
뜨랑은 안다만해를 접하고 있는 태국 남부의 도시로 46개의 섬을 포함한다. 꼬묵, 꼬응아이, 꼬끄라단 같은 섬들이 유명하다. 보통 섬과 바다를 여행한 후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뜨랑에 들른다. 돈므앙 공항으로 가는 국내선도 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