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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메달 Aug 30. 2020

불안하지 않아, 분노가 더 깊어

815 광복절 이후 보름, 분노

8월 15일 이후로 뭔가 단절이 된 느낌이다. 손으로 매일을 기록하는 공책에는 8월 15일 이후로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돌아다보면, 나는 불안을 품었다기보다 분노를 품었다. 광복절날 광화문 광장에 일장기가 내걸린 모습에 분노했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첨예한 현실에서 그렇게 사람이 운집한 것에 분노했다. 거기에서 확진자가 나오고, 병원에 실려가면서 쏟아내는 그 말들에 또 분노했다. 그렇게 며칠을 분노하며 내 에너지를 다 쏟는다는 느낌에 광광 거리다, 또 의사 파업을 보았다. 여기에서도 불안보다도 분노가 더 컸다.


이렇게 보름이 지났다. 보름 동안 다시 나는 내 안의 문을 걸어 잠그고 굴을 파기 시작했다. 책을 읽었고, 틈틈이 글을 쓰기도 했고, 예정된 일정을 온라인으로 전환하며 일도 했다. 그럼에도 중요한 내 안의 우선순위는 다 놓치고 있었다. 원고 청탁 채널에 첫 스타트 원고를 송출하지 못했고, 정기적으로 쓰는 칼럼에도 원고를 굶었다. 진심을 담아서 한 줄도 못 쓰겠는 거다. 일상의 기록용으로 무엇을 쓰는 것은 하겠는데, 어떤 매체에 누가 독자인지 아는 공간에는 정말 한 줄도 못 쓰겠는 거다. 내 분노가 글에 전달되고 전이되어서 다른 사람들도 같이 분노할까 봐 공식적인 글은 못 쓰겠는 것이다.


왜 이렇게 분노하는지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니,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다. 17일 일정 두 개를 취소했지, 20일 미팅도 취소했지, 21일 오프에서 하려는 행사는 온라인으로 전환하면서 기운을 빼지, 26일 중요한 이별식이 있었는데 못 갔지. 죄다 꼬여 버린 일정이 서러워 꺼이꺼이 울고 싶었고, 나는 이렇듯 미친 듯이 모든 생활 패턴 다 바꾸어 가면서 용쓰고 있는데, 저들은 왜 저리도 뻔뻔한가, 하는 불쾌감이 단순히 코로나 바이러스 불안을 뛰어넘어서 나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 분노에 갇혀서 무엇을 해도 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었다. 책도 이것 읽다가 덮어두고 다른 것 읽고, 또 그거 읽다가 다른 것 집어 드는 미친 짓이 며칠째 반복되고, 노트북 창은 열 개 넘게 열어두고는 이 페이지, 저 페이지를 넘나 들고 있었다. 도대체 이론 황당한 개인 상황을 무엇으로 설명하고 이해해야 하는가.


코로나가 정점을 찍던 3월, 4월에 국 있는 친구가 연락이 왔다. 서로 톡으로 안부를 묻다가 결국 목소리를 주고받았는데 그때 그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무엇을 하든 집중이 안 된다. 밥을 하다가도 학교에 있는 아들이 떠오르고, 책을 보다가도 갑자기 한국 있는 부모님이 생각나고, 그래서 자전거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바람을 마셔봐도 가슴이 두근두근 하며 당체 집중이 안 되는데, 이게 뭔지 모르겠다. 타국 30년 사는 동안 처음 겪는 이 증상이 미치도록 싫다고 긴 하소연을 했다. 그때는 그 말이 그리 깊게 와 닿지 않더니만, 요즘 며칠 내가 그 증상이었던 것 같다. 뭔지 모르는 바람이 쌩하고 부는 느낌들.


8월 29일, 토요일. 이 달을 마무리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고, 이런 분노가 아무것에도 도움되지 않고, 문제 해결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니 정신이 반쯤 돌아온다. 정말 총을 소지할 수 있는 나라였으면 사고 났겠다는 상상을 8월 15일 이후 보름 동안 하며 보냈다. 내 분노는 그만큼 컸다. 타인의 일탈에 내 인생을 갈아 넣는 엄청난 상상도 되는 것이다.


바이러스에 이름이 달린 것도 아니고 바이러스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도 아니고, 발 동동 구르며 짜증내고 분노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그럼에도 전염병의 방역은 과학과 의학이 1차 책임지만 2차 방역은 정치와 시민성의 콜라보라는 어느 의료진의 말이 두고두고 기억된다. 시민성이라는 말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사회현상을 보면서 사실은 절망했고. 그 절망이 불안보다는 분노가 더 컸고, 나를 깎아먹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 이게 더 무서운 것이구나. 불안으로 시작하여 분노로 감정이 바뀌는 그 전환점에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나는, 우리는, 서서히 망가지는 것 시간문제이다, 생각하니 소롬이 돋았다.


앞으로 무엇으로 살아가고, 살아지는 것인지. 아득한 이 와중에 방송인 허지웅의 책 두 권이 들어왔다. 동시에 두 권을 펼쳐두고는 제목에 또 의미를 붙였다. 책 제목을 보면서 내가 힘을 얻으려고. 이렇게라도 용쓰고, 애쓴다.


"버티는 삶에 대하여(허지웅 책 제목)"

"살고 싶다는 농담(허지웅 책 제목)"


그냥 중얼거려본다. 버티면 살아질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강한 의미를 넣으며 지옥 같았던 광복절 이후의 보름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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