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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계동길

13화: 조용한 위로, 그리고 작은 변화

by 나바드

겨울밤의 차가운 바람이 계동리의 유리창을 스치고 지나갔다. 밖은 점점 더 추워지고 있었지만, 가게 안은 여전히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잔들이 놓였고, 손님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이곳을 찾아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주인장은 여느 때처럼 바 뒤에서 잔을 닦으며, 오늘의 손님들을 조용히 맞이했다.


1. 방송국 PD의 고민,

그리고 주인장의 한마디


“오늘은 좀 일찍 왔어요.”


늘 다크서클을 달고 다니는 방송국 PD 이희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앉더니, 주인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주 한 병 주세요.”


주인장은 말없이 소주를 따라주었다.


그가 한 모금을 넘기고 나서야,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요즘 고민이 많아요.”


“어떤 고민이요?”


“다큐멘터리, 찍을까 말까.”


희재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그냥 가볍게 생각했어요. 계동리, 이 공간에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보면 좋겠다고.”


그는 조용히 잔을 흔들었다.


“근데 막상 카메라를 들이대려니까, 이 공간이 카메라 밖에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주인장은 말없이 희재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


“어떤 선택을 하든, 중요한 건 그게 당신에게 의미 있는 일이냐는 거겠죠.”


희재는 그 말을 가만히 곱씹으며, 다시 한 모금을 삼켰다.


그의 고민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 정년을 앞둔 가장,

그리고 젊은 손님과의 대화


그때, 문이 열리며 정년을 앞둔 가장 윤석진이 들어왔다. 그는 늘 그렇듯 조용한 걸음으로 창가 자리에 앉았다.


“오늘도 맥주 한 잔 부탁해요.”


주인장은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웠다.


잠시 후, 다른 손님이 그 옆 테이블에 앉았다.

취업 준비생 강도윤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잔을 기울였다.


그러다 우연히 도윤이 윤석진의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았다.


“퇴직 관련 서류인가 보네요.”


윤석진은 고개를 들며 가볍게 웃었다.


“네, 이제 곧 은퇴하니까요.”


도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퇴직하시면… 어떤 기분이 드세요?”


윤석진은 조용히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솔직히 말하면… 허전해요.”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수십 년 동안 출근하던 길을 더 이상 걷지 않는다는 게, 생각보다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도윤은 그 말을 곱씹으며, 조용히 잔을 기울였다.


“저는 아직 사회에 나가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힘든데요.”


그 말에 윤석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죠.

사회라는 게 참…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


그들의 대화는 길지 않았지만,

서로의 잔이 비워질 때까지 이어졌다.


이 공간에서, 나이도, 삶의 위치도 다르지만, 같은 고민을 나눌 수 있다는 게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3. 김민석과 최소현,

조금씩 가까워지는 두 사람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김민석이 기타를 멘 채로 들어왔다.


그는 익숙한 듯 바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최소현도 가게로 들어왔다.


그녀는 늘 그렇듯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주인장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테이블에 커피를 놓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계동리를 걸으셨어요?”


“네, 이 동네를 좋아하니까요.”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자연스럽게 김민석을 바라보았다.


그는 기타를 조용히 튕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날의 우리는 어디쯤에 있을까

그때의 너와 난, 아직도 거기 있을까”


그의 목소리는 계동리의 공기를 감싸 안았다.


최소현은 조용히 그 노래를 들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커피잔을 문지르며,

조용히 명함을 한 장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녀가 남긴 명함, 그리고 쿠키 한 개.


김민석은 노래를 부르며, 그녀가 남긴 흔적을 바라보았다.


그의 미소가 살짝 번졌다.


4. 계동리의 밤, 그리고 주인장의 작은 배려


주인장은 바 뒤에서 조용히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지친 얼굴을 하고 들어왔던 방송국 PD는 잔을 기울이며 고민을 잠시 내려놓았고, 정년을 앞둔 가장과 취업 준비생은 나이와 상관없이 같은 고민을 나누고 있었으며, 기타를 치던 싱어송라이터와 건축가는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런 장면들을 조용히 지켜보며, 작은 온기를 보탰다.


추운 손님에게는 히터를 조금 더 가까이 조정했고,

피곤해 보이는 손님에게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슬며시 놓아두었다.


그리고 가만히, 계동리 사람들 노트를 펼쳤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이곳에서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위로를 받는다.”


주인장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노트를 덮었다.


오늘도, 계동리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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