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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계동길

11화 깊어지는 밤, 마음을 두드리는 순간

by 나바드

늦은 밤, 계동리는 여느 때처럼 은은한 조명 아래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바깥에는 찬 공기가 돌았지만, 가게 안은 따뜻했다.

커피머신에서 풍기는 고소한 향과 낮게 흐르는 재즈 선율이 공기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주인장은 바 뒤에서 잔을 닦으며, 들어오는 손님들을 조용히 맞이했다.


1. 익숙한 얼굴, 익숙한 공간

“사장님, 오늘도 한잔 부탁드립니다.”

서울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의사 김봉준이 문을 열며 들어왔다.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은 마취과 의사 임수정과 병동 간호사 유진수였다.

“오늘따라 얼굴이 많이 지쳐 보이는데요.”

주인장이 조용히 말을 건네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먼저 내밀었다.

“오늘 하루종일 응급실이 전쟁터였거든요.”

김봉준은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건… 노력해도 손쓸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는 거죠.”

그의 말에, 임수정이 조용히 잔을 들었다.

“우리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지만, 때론 우리가 할 수 없는 순간도 있잖아요.”

유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이곳에 오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이 공간은… 모든 걸 내려놓아도 되는 곳 같아서요.”

주인장은 말없이 그들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오늘 하루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오늘 하루를 버텨낸 그들에게 조용한 위로가 되었다.


2. 형제의 밤, 그리고 오랜만의 대화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두 남자가 함께 들어왔다.

한 명은 늦은 나이에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취준생 이정훈,
다른 한 명은 대기업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는 형 이상우였다.

“형, 여기 좋네.”

정훈은 둘러보며 조용한 분위기에 감탄했다.

상우는 말없이 자리에 앉으며 주인장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무엇을 드릴까요?”

주인장의 질문에 상우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소주 한 병 주세요.”

그는 조용히 잔을 기울이며, 오랜만에 동생을 바라보았다.

“요즘 취업 준비는 잘 돼가?”

“형도 알잖아. 쉽지 않다는 거.”

정훈은 힘없이 웃으며 맥주를 한 잔 마셨다.

“솔직히 말하면, 좀 지쳐.”

그 한마디에, 상우는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

“나도 예전에 취업 준비할 때 그랬어. 힘든데,

누가 쉽게 위로해 줄 수도 없고.”

“그래도 형은 성공했잖아.”

“성공?”

상우는 작게 웃었다.

“퇴근하면 집에 가서 기절할 정도로 피곤하고,

하루 종일 보고서 쓰다가 밤 10시에 퇴근하는 게 성공이면… 그럴 수도 있겠네.”

정훈은 순간 말을 멈췄다.

자신이 바라보던 형의 모습은 늘 단단하고 완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도 나름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구나.

주인장은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며, 조용히 히터 방향을 조정했다.

추운 겨울밤, 형제의 대화가 조금 더 따뜻한 공기 속에서 이어질 수 있도록.


3. 익숙한 선율, 그리고 김민석의 노래

잠시 후, 기타를 둘러멘 김민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바 한쪽에 앉으며 기타를 가볍게 튕겼다.

“오늘도 한 곡 부탁드려도 될까요?”

주인장이 묻자, 김민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기타 소리가 계동리의 공기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운 사람이 있나요
그리운 순간이 있나요
그때의 나와 너는 아직도 거기 있나요”

그의 목소리는 잔잔했고, 가사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형제는 조용히 노래를 들으며, 각자의 잔을 기울였다.

응급실에서 고된 하루를 보낸 의사와 간호사들도, 순간 눈을 감고 멜로디에 몸을 맡겼다.

누군가는 한숨을 쉬었고, 누군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주인장은 조용히 그 모든 장면을 바라보며, 다시 잔을 닦았다.

계동리는, 그렇게 또 하나의 밤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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