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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계동길

9화: 흔적이 남는 공간

by 나바드


계동리의 문이 열렸다.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가 안으로 스며들었다가, 따뜻한 조명과 커피 향에 묻혀 사라졌다. 바쁜 하루를 마치고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인장은 늘 그렇듯 조용히 바 뒤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


오래된 단골, 그리고 작은 변화

가장 먼저 들어온 손님은 최용찬과 박지윤이었다.

“오늘은 우리만 먼저 왔네요?”

박지윤이 코트를 벗으며 자리로 향했다.

최용찬은 말없이 그녀를 따라가며 의자에 앉았다.


“임관훈은?”

주인장이 물었다.

“아직 일이 남았대요. 후배들 케어도 하고 있나 봐요.”

박지윤은 가볍게 웃었다. 용찬은 조용히 맥주를 한 잔 주문한 뒤,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주인장은 가볍게 히터 방향을 조정했다.

유독 손을 자주 문지르는 용찬을 위해 조금 더 따뜻한 공기가 닿도록.


“어떤 하루였어요?”

그의 물음에, 지윤이 먼저 대답했다.

“사건 하나를 판결했어요. 쉽지 않았죠. 판결문을 쓰면서 계속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용찬도 조용히 맞장구쳤다.

“가끔은 우리가 맞는 결정을 하고 있는지 확신이 안 설 때도 있어요.”


주인장은 말없이 따뜻한 위스키 한 잔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가끔은, 답을 몰라도 나아가는 게 중요한 순간도 있죠.”

지윤은 그 말을 곱씹듯이 위스키 잔을 바라보았다.


짧은 방문, 그리고 흔적

그때, 문이 또 열렸다.

이번에는 한 젊은 남성이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는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 자리 한쪽에 앉았다.

“무엇을 드릴까요?”

주인장이 조용히 물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부탁드려요.”

낮게 깔린 목소리. 그는 주문을 마치고 조용히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더니, 천천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몇 분 동안 계동리에는 글 쓰는 소리와 잔을 기울이는 작은 소리들만이 공간을 채웠다.


박지윤이 조용히 속삭였다.

“저분, 작가인가 봐요.”

주인장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꽤 오곤 해요.”


잠시 후, 커피를 다 마신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인장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좋은 공간이네요. 따뜻한 곳에서 글을 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조용히 나갔다.


그러나 그의 자리에는 작은 종이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계동리 사람들’ 노트


주인장은 그것을 살짝 들어 펼쳐 보았다.


“어느 공간이든 누군가의 흔적이 남는다.

이곳은 그 흔적들이 조용히 스며드는 곳이다.
다시 올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 머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는 조용히 노트를 덮었다.

“사장님, 뭐예요?”


박지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주인장은 잔을 닦으며 말했다.

“계동리 사람들의 흔적.”


그는 노트를 바 뒤 선반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계동리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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