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겨울밤, 음악이 흐르는 공간
겨울밤의 공기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
하지만 계동리는 늘 그렇듯, 따뜻한 조명과 커피 향이 가득했다.
바깥에서는 눈발이 가볍게 흩날리고 있었고,
계동리의 문이 열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순간적으로 흘러들었다.
주인장은 늘 그렇듯 바 뒤에서 잔을 닦으며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장님,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가장 먼저 문을 연 사람은 H건설사의 건축구조설계팀 팀장 오경식과 팀원 최준혁, 최소진이었다.
그들은 단골이었다. 늘 야근을 끝낸 뒤 계동리에 들러 술 한 잔을 기울이며 하루를 정리했다.
“오늘은 어떤 하루였어요?” 주인장이 물었다.
“그야말로 전쟁터였죠. 연말이 다가오니까 프로젝트 마감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경식이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자리에 앉았다.
주인장은 아무 말 없이 히터 방향을 그들이 앉은 쪽으로 조정했다.
하루 종일 차가운 건물 바깥을 돌아다녔을 그들을 위한 배려였다.
“따뜻한 거부터 드세요.”
주인장은 차가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작은 잔에 데운 위스키를 따라 건넸다.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방송국 PD 이희재가 들어섰다.
그의 눈 밑에는 늘 그렇듯 깊은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방송 준비를 하다가 오셨어요?”
주인장이 묻자 희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요즘 세상은 참 피곤한데, 방송국은 더 피곤한 곳입니다.”
그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고,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그리고 잠시 후, 주인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장님,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 기억하세요?”
주인장은 잔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동리를 배경으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고 하셨죠.”
“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다큐를 만들면 어떨까 싶어요.”
희재는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오는 사람들, 다들 평범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때, 문이 또 한 번 열렸다.
버스킹과, 첫눈 같은 순간 이번에는 김민석이 들어왔다.
그는 손에 기타를 들고 있었고, 두꺼운 목도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오늘도 한 곡 해볼까요?”
그는 주인장에게 가볍게 인사하며 바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최소현이었다.
그녀는 코트 깃을 세운 채 계동리에 들어서더니, 자연스럽게 창가 자리를 골랐다.
주인장은 그녀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오늘도 계동을 걸으셨나 봐요.”
“네, 이 동네를 좋아하니까요.”
그녀는 커피 잔을 손에 쥐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김민석을 향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기타를 가볍게 튕기며 천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어쩌면 처음 만난 그날보다 더 멀어진 걸까 그때의 너와 난 아직도 거기 있을까.”
따뜻한 조명 아래, 그의 목소리는 계동리 전체를 감싸 안았다. 사람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최소현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음악이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지갑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코트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한 장과 쿠키 몇 개를 꺼냈다.
그것은 그녀가 운영하는 건축설계사무소의 명함이었다.
노래가 끝난 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김민석의 앞에 놓인 버스킹함에 명함과 쿠키를 넣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으며 계동리를 나섰다.
김민석은 버스킹함을 바라보다가, 작은 쿠키와 명함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이런 방식으로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있네.”
그는 명함을 살짝 펼쳐 보았다.
‘최소현 – 건축가’
계동리의 밤, 그리고 그 공간
주인장은 이 모든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손님들이 늘 오고 가지만, 이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순간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추워하는 손님들에게는 따뜻한 음료와 히터를,
더워하는 손님들에게는 시원한 얼음 차를,
지친 손님들에게는 조용한 위로를 건네는 공간.
계동리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렇게 한 편의 이야기가 완성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