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
늦겨울의 끝자락, 계동리의 불빛이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창밖을 스치는 바람 속에서도 봄의 기운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여전히 계동리는 같은 자리에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주인장은 조용히 바 뒤에서 잔을 닦으며, 오늘도 하나둘 들어오는 손님들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며 윤석진이 들어왔다.
그는 평소처럼 창가 자리에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주인장이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오늘은 어떤 하루였나요?”
윤석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조용히 웃었다.
“이제 퇴직이 정말 코앞이에요.”
그는 잔을 기울이며 잠시 말을 멈췄다.
“마지막 출근길을 걸어가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매일 걸어온 길인데,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까?”
주인장은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40년 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늘 같은 루틴을 반복했는데,
이제는 그 루틴이 사라진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두렵기도 하더군요.”
주인장은 조용히 말했다.
“낯선 길을 걸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 길에서 새로운 것을 찾을 수도 있겠죠.”
윤석진은 조용히 웃으며 맥주잔을 기울였다.
“이제는, 새로운 길을 찾아봐야겠네요.”
그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문이 열리며 김봉준, 임수정, 유진수가 들어왔다.
오늘은 조금 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맥주를 주문했다.
주인장이 물었다.
“오늘은 표정이 좋으시네요.”
진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조금 한가했거든요.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죠.”
봉준이 맥주잔을 들며 말했다.
“근데 말이에요… 의사라는 게,
평생 공부를 해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그런데 가끔은,
우리가 정말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싶은 순간이 있어요.”
수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맞아요. 늘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과연 우리가 환자들에게 최선의 선택을 해주고 있는 건지…
고민이 들 때가 많아요.”
주인장은 조용히 따뜻한 차 한 잔을 그들 앞에 놓았다.
“고민이 많다는 건, 그만큼 진지하게 환자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들은 잔을 부딪치며 조용히 웃었다.
오늘 밤, 그들은 고민 속에서도 자신들의 길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늦은 밤, 문이 열리며 최소현이 들어왔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잠시 후, 김민석이 기타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그녀를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오늘도 오셨네요.”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는 여기가 제일 편한 곳이 됐어요.”
김민석은 기타를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어떤 노래를 듣고 싶나요?”
최소현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노래를 들려주세요.”
김민석은 살짝 웃으며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지나간 계절의 끝에서
우리는 같은 공간에 머물며
새로운 길을 기다리고 있다”
최소현은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노래를 들었다.
봄이 오면,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이 공간에서 다시 만나게 될까.
그날 밤, 한 손님이 바 한쪽에 비치된 ‘계동리 사람들’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한 줄을 남겼다.
“새로운 계절이 오면,
우리는 또다시 같은 공간에서 만나게 되겠지.”
주인장은 노트를 덮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공기 속에는, 어느새 봄의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계동리는 여전히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