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봄이 스며드는 공간
길거리에 남아있던 겨울의 흔적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공기 속에는 어렴풋이 봄의 기운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계동리는 여전히 같은 온도를 유지한 채,
하루를 마치고 온 사람들을 조용히 맞이하고 있었다.
주인장은 바 뒤에서 잔을 닦으며, 하나둘 들어오는 손님들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며 김봉준, 임수정, 유진수가 들어왔다.
오늘은 유난히 말수가 적었다.
주인장은 조용히 물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나요?”
진수가 가만히 맥주잔을 쥐며 말했다.
“오늘, 어떤 환자가 수술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눴어요.”
봉준이 잔을 기울이며 덧붙였다.
“수술 성공 확률이 낮았거든요.
우리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결과는 좋지 않았어요.”
수정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환자들을 보내는 순간이 가장 힘들어요.
정말 최선을 다했어도, 끝까지 무력하게 느껴지거든요.”
주인장은 잔을 닦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분들도 아마 아셨을 거예요.
마지막까지, 누군가가 진심을 다해 노력해 주었다는 걸요.”
세 사람은 조용히 잔을 기울였다.
오늘은 말없이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날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윤석진이 들어왔다.
그는 조용히 창가 자리에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주인장이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오늘은 어떤 하루였나요?”
윤석진은 잔을 천천히 기울이며 말했다.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런데, 막상 회사에서 내 책상을 정리하고 나니…
이상하게 허전하더군요.”
주인장은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40년 동안 회사에서 보낸 시간은, 내 인생의 절반이었어요.
이제는 그 시간이 끝난다는 게…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요.”
주인장은 조용히 따뜻한 차 한 잔을 그의 앞에 놓았다.
“지금까지는 가족을 위해 살아오셨다면,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죠.”
윤석진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맞아요. 이제는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야겠죠.”
그의 눈빛에는, 처음보다 조금 더 단단한 다짐이 서려 있었다.
늦은 밤, 문이 열리며 최소현이 들어왔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잠시 후, 김민석이 기타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그녀를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도 오셨네요.”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는 이곳이 익숙해졌어요.”
김민석은 기타를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어떤 노래를 듣고 싶나요?”
최소현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제 곧 봄이 오잖아요.
그런 계절에 어울리는 노래를 들려주세요.”
김민석은 살짝 웃으며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다.
“언젠가 찾아올 봄을 기다리며,
우리는 같은 공간에 머물고 있다.
바람이 불어도, 시간이 흘러도,
이 순간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최소현은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노래를 들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거리의 공기가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거리는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날 밤, 한 손님이 바 한쪽에 비치된 ‘계동리 사람들’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한 줄을 남겼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다.
하지만, 이곳의 온기는 여전히 그대로다.”
주인장은 노트를 덮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밤바람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계동리는 여전히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