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봄이 오기 전, 남겨진 것들
아직은 늦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남아 있었지만, 공기 속에는 서서히 봄의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가게 안에서는 여전히 커피 향과 위스키 향이 은은하게 섞이며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주인장은 조용히 바 뒤에서 잔을 닦으며, 오늘도 하나둘 들어오는 손님들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며 이희재 PD가 들어왔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앉으며, 익숙한 듯 소주를 주문했다.
주인장이 조용히 병과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오늘은 어떤 고민인가요?”
희재는 소주를 한 잔 따르고는, 천천히 마셨다.
“드디어, 다큐멘터리 촬영이 시작됐어요.”
주인장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
“계동리 이야기인가요?”
희재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곳에 오는 손님들, 그들의 하루, 그들의 고민…
이 공간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영상으로 담아보기로 했어요.”
그는 잔을 기울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과연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요?”
주인장은 말없이 잔을 닦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 공간에서 나눈 대화들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듯이…
그 다큐멘터리도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을 겁니다.”
희재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다시 소주를 따랐다.
오늘 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김봉준, 임수정, 유진수가 들어왔다.
그들은 익숙한 자리에 앉아 조용히 맥주를 주문했다.
오늘따라 말이 적었다.
주인장은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나요?”
수정이 가만히 맥주잔을 쥐며 말했다.
“하루 종일 바빴어요.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는 매일 이렇게 바쁘게 살면서도,
정작 스스로에 대해서는 생각할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봉준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덧붙였다.
“맞아요. 늘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려 애쓰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의 삶은 그냥 흘러가는 것 같아요.”
진수가 조용히 말했다.
“가끔은,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무는 시간도 필요한 것 같아요.”
주인장은 잔을 닦으며 조용히 말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될 수도 있죠.”
그들은 조용히 술잔을 부딪쳤다.
오늘 밤, 그들은 오랜만에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냈다.
늦은 밤, 문이 열리며 최소현이 들어왔다.
그녀는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잠시 후, 김민석이 기타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그녀를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오늘도 오셨네요.”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는 여기가 제일 편한 곳이 됐어요.”
김민석은 기타를 내려놓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어떤 노래를 듣고 싶나요?”
최소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 기다리는 마음이 담긴 노래를 들려주세요.”
김민석은 살짝 웃으며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다.
“봄이 오길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
시간이 흘러도, 마음은 그대로니까”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노래를 들었다.
그들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날 밤, 한 손님이 바 한쪽에 비치된 ‘계동리 사람들’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한 줄을 남겼다.
“기다리는 마음도 소중하다.
봄이 오듯, 언젠가 나의 시간도 오겠지.”
주인장은 노트를 덮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계동리는 여전히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