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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朝鮮籍) 할머니와의 열흘

열아홉 번째 밤 – 고향의 향기

by 나바드

열아홉 번째 밤, 우리는 할머니의 작은 셋방에 모였다. 이날은 특별히 할머니가 고향 음식을 대접해 주겠다고 하셨다. 좁은 부엌에서 정성껏 만든 비빔밥과 미역국, 김치가 식탁 위에 올랐다. “와, 할머니 손맛 대단하시네요!” 나와 동석한 이웃들이 감탄했다. 사실 할머니는 예전부터 동네에서 “김치할머니”로 통했다. 직접 담근 김치를 나눠주고, 일본 사람들에게 김치 담그는 법도 가르쳐주곤 했다. 오늘 나온 배추김치 역시 직접 담근 것으로 아삭하고 칼칼한 맛이 일품이었다.


음식을 먹으며 자연스레 고향 이야기가 오갔다. 할머니는 평안남도 시골 마을 출신이었다. 어릴 적 먹었던 음식, 보았던 강산, 뛰놀던 친구들에 대한 추억을 하나씩 풀어냈다. “봄이면 산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지. 그거 따다 화전 부쳐먹으면 그렇게 맛있었는데…” “우리 엄마는 손두부를 기가 막히게 만들었어. 몽글몽글한 순두부에 간장 넣고 먹으면 꿀맛이었지.”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1930~40년대 옛날 한국 시골에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의 눈에는 그리움과 향수가 어린 빛이 감돌았다.


“이젠 꿈에만 나와. 내 고향집 우물도, 동네 친구들도….” 그녀는 먼 산을 보듯 허공을 바라봤다. 옆에 있던 일본인 친구가 물었다. “할머니, 아직도 북한에 친척이 계실까요?” 할머니는 모른다고 했다. “사실 이젠 다 돌아가셨겠지. 있어도 그 손자 손녀들일 텐데, 우린 서로 모르고…” 그러면서 흐릿한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1940년대 초, 고향에서 가족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아직 소녀였던 할머니와 부모, 남매들이 한복을 입고 앉아 있는 흑백사진. “다들 저 세상에 있고 나 혼자 남았네. 허허” 쓸쓸한 웃음이 흘렀다.


나는 사진 속 배경을 가만히 보았다. 기와집과 뒤의 들판, 멀리 보이는 산세…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다. 할머니의 고향은 분단으로 인해 지금은 쉽게 갈 수 없는 북한 땅이다. 하지만 사진과 기억 속에선 영원히 존재한다.


할머니는 음식을 다 먹은 후, 옷장 서랍에서 낡은 보자기 하나를 꺼내왔다. 그 안에는 몇 개의 유품이 담겨 있었다. “이건 우리 어머니가 쓰던 노리개야. 이건 아버지가 쓰시던 담배떼꾸.” 또 하나는 작은 항아리 조각이었다. “이건 우리 집 장독이 깨진 걸 주워온 거야. 일본 올 때 이걸 들고 왔지.” 놀라운 일이었다. 소녀였던 그녀가 80년 전 일본으로 떠날 때 고향집 장독 조각을 챙겨 왔다는 것이다. “흙 한 줌이라도 가져오고 싶어서… 그게 고작 이거였네.” 그녀는 조각을 꼭 쥐었다. “이거 만질 때마다 고향 냄새가 나는 거 같아.”


방 안에는 순간 숙연한 공기가 감돌았다. 모두가 말없이 할머니 손을 바라봤다. 그 작은 항아리 조각에 얼마나 깊은 그리움과 정한(情恨)이 서려 있을지 헤아릴 수 없었다. 내가 그 심정을 어찌 다 알 까마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할머니는 조각을 다시 보자기에 싸며 말했다. “그래도 이젠 됐다. 나 없이도 고향 잘 있겠지. 통일되면 자네가 한번 가보려무나.” 갑작스러운 부탁에 나는 당황했다. “저, 저요?” “그래, 통일되고 나면 젊은이들이 가서 우리 같은 할매할배 묘도 찾아주고, 기록도 좀 찾아주고… 해주면 얼마나 좋겠나.” 나는 그 자리에서 맹세하듯 말했다. “꼭 그럴게요. 통일되면 할머니 고향 같이 가요. 안 되면 제가라도 가서 소식 전해드릴게요.” 할머니는 환하게 웃었다. “하하 고맙구먼. 나 못 가면 꿈에라도 좀 보고 가야지.”


그날 밤, 우리는 함께 아리랑을 불렀다. 할머니가 먼저 허름한 목소리로 가락을 뽑자, 우리도 따라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노랫소리가 방 안 가득 번졌다. 고향의 노래, 고향의 맛, 고향의 기억이 어우러져 모두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주었다. 그 밤은 할머니뿐 아니라 함께 한 모든 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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