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밤 – 이별과 새로운 시작
마지막 스무 번째 밤. 나는 약속한 열흘 간의 기록을 모두 마치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떠나기 전 날 저녁, 할머니와 나는 다시 처음 만났던 그 선술집에서 마주 앉았다. “벌써 열흘이 다 지났네. 자네 내일 가누만…” 할머니가 말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떨궜다. “네, 회사에서 오래 비울 수가 없어서… 하지만 틈틈이 다시 찾아뵐게요.”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와줘서 고맙네. 내 이야길 들어줘서 속이 다 시원해.”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사실 겁도 났어. 내가 괜히 옛날 일 꺼내서 누를 끼치는 건 아닌가… 근데 자네가 진심으로 들어주니 용기가 났다네.” 나는 두 손으로 할머니의 손을 감싸 쥐었다. “오히려 제가 감사했어요. 정말 많은 걸 배웠습니다.”
돌이켜보면 열 밤 사이에 나는 역사 교과서 몇 권보다 깊은 배움을 얻었다. 한 인간의 삶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본 것이다. 특히 내게 남은 깨달음은 “공감”과 “기억”의 힘이었다. 과거에 대해 무지했던 내가 할머니와 공감하려 노력하고, 그분의 기억을 꼼꼼히 기록하며 이해의 폭을 넓혔다. 이를 통해 비로소 재일동포들을 향한 진정한 연대가 가능함을 느꼈다. 할머니도 그런 내 태도를 알아주신 듯했다. “자네처럼만 알아주면 우리가 뭐 더 바라겠나. 우리는 다 늙어 가지만, 기록은 남는 거지.”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건배를 하며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할머니는 “꼭 다시 오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고, 나는 머리 숙여 인사드렸다. 그리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이별을 했다.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으며 골목을 돌아섰을 때, 할머니는 여전히 가게 앞에 서서 손을 흔들고 계셨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열흘간의 메모를 정리했다. 이 작은 수첩에 담긴 이야기들이 곧 활자가 되어 세상에 나갈 것이다. 문득 창밖으로 바다와 섬들이 보였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일본과 한반도는 경계도 분단도 없이 이어진 한 공간처럼 보였다. 국경과 국적이라는 것이 인간이 만든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한 공간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같은 사람들인데, 그간 얼마나 어리석게도 서로를 갈라놓고 미워했던가.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런 인위적 경계에 가로막혀 고단했던 사람들의 기록이었다.
내가 이 기록을 마무리하며 바라던 것은 하나다.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읽고 공감해 주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누군가에겐 재일동포의 역사가 낯설겠지만, 할머니의 진솔한 삶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일본에 살게 되었고 어떤 차별을 겪었으며 어떻게 극복해 왔는지를 이해하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금도 지구촌 어디엔가 남아 있을 또 다른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내게 남긴 한마디를 전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떠나는 날 아침,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비록 조그맣고 약한 사람들이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여태 지켜왔어. 그리고 마침내 알아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생기잖아. 앞으로는 우리 같은 사람들 더는 없도록, 자네들이 잘 만들어가주게 나.”
이것은 할머니 개인의 바람을 넘어, 역사를 살아온 평범한 이들의 보편적 소망일 것이다. 차별과 분쟁이 없는 세상, 서로를 이해하고 품어주는 세상. 그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는 이 기록을 작은 밀알로 보낸다.
모든 이야기를 마치며, 일본의 작은 선술집에서 만난 90세 조선적 할머니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그녀의 삶은 나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긴 여운과 가르침을 남겼다. 이제 나는 그 메시지를 안고 다시 나의 일상과 사회로 돌아간다. 그러나 더 이상 예전의 나가 아니다. 나는 그 열 밤의 기록을 통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녀와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