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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잔상이, 눈을 뜨면 그림자가

습작의 창고

by 나바드

눈을 감으면 잔상이, 눈을 뜨면 그림자가


밤은 나에게 평등하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휴식이고,

누군가에게는 재충전이며,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스며드는 시간이겠지만,

나에게 밤은 늘 도망쳐야 할 시간이다.


눈을 감는다는 건 휴식을 뜻하지 않는다.

내게 그것은 ‘불러들이는 의식’에 가깝다.

하루 동안 외면한 기억들,

사라진 얼굴들,

말하지 못한 말들,

다친 장면들이

눈꺼풀 안에서 잔상으로 재생된다.


마치 꿈도 꾸기 전에

꿈보다 선명한 악몽이

눈 뒤편에서 먼저 깃든다.

몸은 침대 위에 있지만,

내 정신은 날마다 무너진 폐허 속을 맴돈다.


그래서 눈을 감지 않는다.

그건 너무 위험하다.

하지만 눈을 뜨면 더 위험해진다.

침대 모서리에, 책상 밑에, 커튼 틈에

내 그림자가 숨어 있다.


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그림자는 나보다 먼저 움직인다.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나는 이미 사로잡혀 있다.

그림자는 나를 먹는다.

의심과 불안과 피로를.


그래서 밤마다 고민한다.

오늘 밤은 어디에 숨어야 할까.

머리를 이불속에 파묻을까.

화장실 불을 켜놓고 앉아 있을까.

음악을 틀고, 조명을 끄고,

책을 읽다 잠들어버릴까.

아니면, 아예 잠을 포기할까.


이 밤은 전쟁이다.

무기가 없는 전쟁.

침묵이 가장 큰 소음이고,

불이 꺼지면 그림자가 깨어난다.


사람들은 모른다.

잠들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치열한 고통인지.

밤이 오는 게 두렵다는 말을

누구에게 해야 할지 모른다.

어른이 되어도, 누구도 묻지 않는다.

‘요즘 밤은 잘 지나가?’라고.


그래서 나 혼자

새벽을 견딘다.

숨소리를 죽이고,

움직이지도 않고,

단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죽은 시간 위에 누워 있는 것이다.


밤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일.

그게 나의 매일 밤 기도이고,

기도는 대답받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잠들 수 없는

잠들지 못할

잠들어선 안 될 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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