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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속도, 무너지는 하루

28년 차 자가면역질환자의 생활기

by 나바드

변하지 않는 속도, 무너지는 하루


요 며칠, 잡스러운 악몽이 자꾸 따라붙는다.
아니, 원래 늘 꾸던 것들이다.

누군가의 부채의식, 혹은 채무감정 안에서 살아가고있다는 기분.
갚지 못한 마음, 돌려주지 못한 사랑,
그것들이 꿈속에서 나를 조여 온다.


추석도, 가을도 아직 멀었건만
몸과 마음은 벌써 그 계절을 기억한다.
최근, 개인적인 일로 두어 번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는 원래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성이 매우 낮다.
그리고 회복탄력성도 좋지 못하다.


저녁이면 정신과 약 세 가지, 수면제 세 알.
두 알, 한 알, 한 알.
늘 정해진 용법대로 먹는다.

졸피람정은 평소 1정 먹습니다.
글이 올리가고 있는 이 순간에는 약을 먹고 누웠을것이다.


그런데 어제는…
말도 안 될 정도의 정서적 폭풍이 휘몰아쳤다.
수면제를 조금 더 추가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밤새,
뜬 눈, 긴 한숨, 깊은 호흡.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아침이 오고, 나는 멍한 상태로
나도 모르는 낯선 생각의 공간 속에 갇혔다.


의식은 흐렸고, 감각은 둔했다.
그 상태로 하루를 버텨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

1층 주방으로 내려갔다.
커피머신 앞에 서서
기계가 내뿜는 증기를 멍하니 바라봤다.
커피를 마셨고, 깨어나려 했다.


그러나 깨어지지 않았다.

다시 2층,
러닝머신 앞에서 러닝화를 신었다.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이키 알파플라이 3’ 같은 카본화로
기록 경신을 목표 삼아 뛰었다.
관절을 내어주는 대가성의 러닝.

지금은 아니다.
‘호카오네오네’ 러닝화.
그저 편하게, 무리 없이.
나를 달래는 방식으로 뛴다.


그런데 오늘은,
정신과 육체가 따로 노는 날이었다.
3km가 지났고,
나는 나도 모르게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최근 들어 가장 좋은 기록.
심장박동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고,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삼키고 있었다.


3분대로 넘어가면 영역4로 가야하는데, 가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발버둥 치며 살아보려 했지만
오늘 하루는 삭제됐다.

재발은 아니다.


그런데 머리가 무겁다.
미열, 오한, 두통.
스트레스로 인한 몸살.
정말 잡스러운 몸이다.


할 일은 많고,
마음은 조급하다.
그런데 몸은…
늘 내 속도를 따라주지 않는다.

머리로는 안다.


“천천히, 길게. 내 몸에 맞게.”
하지만 가슴은 다르다.
늘 오버페이스를 한다.
결국 그게, 늘 나의 발목을 잡는다.

알고 있다. 인간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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