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의 창고
나는 건축을 좋아한다.
안도 다다오의 노출 콘크리트. 그 단단한 표면에 새겨진 침묵과 빛의 균형, 그가 만들어내는 공간 안에는 늘 조용한 긴장감이 감돈다.
르 코르뷔지에의 필로티 구조를 보면,
공간을 지탱하는 방식에도 미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은 말할 것도 없다.
건축이 자연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 건물은 말없이 보여준다.
그런 건축을 마주하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도 건축가가 될 수 있을까?"
건축은 과학과 반항 사이에 있다.
철저히 계산된 각도와 하중 위에,
곡선을 그려 넣고, 창의력을 개입시키고,
질서를 해체하고 다시 엮는다.
건축가는 그 틈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현실과 꿈 사이, 구조와 감성 사이에서 버티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프리츠커상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이름을 새긴 고층 빌딩을 짓고 싶은 것도 아니다. 도청 앞 설계사무소에서 도장값을 벌며 일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되고 싶은 건, 단 하나. '동네건축가'다. 우리 사회는 초고령화로 접어들었고,
지방의 작은 마을들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사라지고 있다. 빈집이 남고, 이름표 없는 골목들이 지워지고, 기억까지 흐려진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흐름을, 아주 조금이라도 거슬러보고 싶다. 사람들이 떠나간 자리, 그 공간을
다시 사람의 온기가 머무는 장소로 되살리는 일.
그게 내가 생각하는 건축의 역할이다.
일본에는 동네의 얼굴을 새롭게 그리는
독창적인 건축가들이 많다. 한국보다 그들이 설 자리가 조금은 더 많다는 것일 뿐, 우리가 덜 뛰어나서가 아니다. 만약 한국에서도 그런 환경이 주어진다면, 나 역시 그 흐름 속에서 하나의 조용한 건축가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파크로열 컬렉션 피커링. 싱가포르의 도심 한가운데, 마치 숲을 올려놓은 듯한 그 건물은 처음부터 압도적이다.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감탄한 건 외형이 아니다.
그 생태를 현실로 만든 구조설계의 깊이였다.
비를 받아 저장하고, 나무를 심고,
수축과 팽창을 견디는 구조. 그 복잡한 가능성을 실현한 누군가가 있었다. 그 사람은, 말하자면 고집스럽게 정직한 계산의 미학을 실천한 사람이다.
건축이란 결국, 불가능을 버티고 끝내 실현하는 사람들의 작업이다.
수영장에 누워 도시의 야경을 바라본다.
곡선의 흐름, 불빛의 리듬, 공간이 주는 깊은 안도감.
그 순간 떠오른 건 제주도의 주상절리였다.
다소 엉뚱한 연상이지만, 어쩌면 내 안엔
건축적 감각보다 삼다수와 흑돼지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운은 남는다. 이 공간, 이 감정, 이 온기.
하지만 그 모든 감상도
“콜라 좀 시원하게 나왔으면…”
하는 생각에 밀려난다.
결국, 건축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횡설수설했지만, 결론은 단순하다.
나는 지금도 ‘동네 건축가’를 꿈꾼다.
이름난 상을 받지 않아도 좋다.
누군가의 삶을 지지해주는 공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장소,
그런 자리 하나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건축은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의 한 조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