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문을 여는 가게
늦은 오후, 계동길에 조용한 바람이 불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길바닥을 적시듯 흩날리며, 서울 한복판에서도 시간이 조금은 느리게 흐르는 곳, ‘계동리’의 밤이 열리고 있었다.
계동리는 종로구 계동 한편에 자리 잡은 작은 바였다. 붉은 벽돌 건물의 2층에 따뜻한 노란빛이 새어 나왔고, 1층의 나무문에는 ‘열림’이라는 작은 팻말이 흔들렸다. 손때 묻은 원목 테이블과 낮게 깔린 재즈 음악, 은은한 조명이 공간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곳은 하루를 마치고 쉬어가는 사람들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네는 장소였다.
바 뒤에서 잔을 닦던 주인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삼십 대 초반에서 중반쯤의 나이로, 단정한 짙은 눈썹과 선이 깊은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말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과 표정은 손님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늘 알고 있는 듯했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은 종종 그를 두고 “세상에 모르는 게 없는 사람 같다”라고 말했다. 어떤 주제든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가끔은 지나가는 대화 속에서도 깊은 통찰을 담아 건넸다. 그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사람들은 묘하게 신뢰를 느꼈다.
가게 바깥에서는 길묘 한 마리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주인장은 익숙한 듯 구석에서 캔 사료를 꺼내어 조용히 내밀었다. 추운 겨울밤이면 거리의 어르신들에게 따뜻한 커피를 내어주기도 했고, 작은 선의들이 쌓여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묘하게 따뜻한 사람’이라는 평이 돌았다. 하지만 그런 그도 가끔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어도, 어딘가 그늘진 분위기가 감돌았다.
문이 열리자, 첫 손님이 들어섰다. 짙은 네이비색 코트를 걸친 남자가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며 익숙한 듯 안쪽 자리로 향했다.
“오늘도 늦으셨네요, 판사님.”
주인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어쩌겠어요. 사건 기록을 보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가버리니까요.”
헌법재판소에서 근무하는 신임 판사 임관훈. 막 임관된 지 3년 차, 아직 법의 무게에 허덕이는 중이었다. 관훈은 따뜻한 위스키 한 잔을 주문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또 다른 손님들이 들어왔다. 선임 판사 최용찬과 동료 판사 박지윤이었다. 두 사람도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주인장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관훈이 또 고민 중인가 보네.”
용찬이 농담처럼 던지자 관훈은 피식 웃었다.
“선배님은 이런 적 없으셨습니까? 판결을 내리는 일이 이렇게까지 무거울 줄은 몰랐어요.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잖아요.”
박지윤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가 아닌 거야. 고민하는 건 좋지만, 혼자서 다 짊어지려고 하진 마.”
주인장은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결국 답은 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법이죠. 다만, 때로는 누군가가 그것을 꺼내줄 필요가 있을 뿐이고요.”
관훈은 조용히 잔을 들었다. 계동리에서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