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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계동길

낯선 손님

by 나바드

늦가을의 밤, 계동리의 문이 다시 열렸다. 낮보다 조용한 밤의 공기는 가벼운 재즈 선율과 어우러져 바닥을 감싸고 있었다. 계절이 깊어질수록 공간은 더욱 따뜻한 빛을 머금었고, 익숙한 손님들의 발걸음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주인장은 늘 그랬듯 조용히 잔을 닦으며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바람이 살짝 흔들리는 문 너머에서 낮게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길쭉한 실루엣, 검은 코트를 걸친 남자가 조심스럽게 안을 둘러보았다. 그는 문턱을 넘으며 작은 목례를 하고 바 안쪽 구석 자리로 조용히 걸어갔다.


“무엇을 드릴까요?”


주인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따뜻한 위스키 한 잔 부탁드립니다.”


낮게 깔린 목소리. 낯선 손님은 차분했지만, 어딘가 익숙한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가볍게 손끝으로 유리잔을 굴렸다. 주인장은 그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위스키를 내밀었다.


“처음 오시는 것 같군요.”


손님은 잔을 가볍게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곳을 자주 지나쳤지만, 들어온 건 처음입니다. 조용한 분위기가 좋네요.”


그 순간, 계동리의 문이 다시 열리며 익숙한 발걸음들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늘도 잘 지내셨어요?”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임관훈이었다. 그는 하루의 무게를 덜어내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바에 걸터앉았다. 뒤이어 최용찬과 박지윤이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은 계동리의 단골이었고, 루틴처럼 이곳에서 하루를 정리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오늘도 야근이야?” 주인장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네. 오늘도 역시…” 임관훈은 한숨을 쉬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러다 계동리에 월세라도 내야 할 판이에요.”


박지윤은 자리 잡으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러게요. 우리가 이 가게 유지비의 30%는 담당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야근은 지겹지만, 여기서 마시는 맥주는 언제나 맛있으니까 봐주죠.” 최용찬이 조용히 말하며 맥주잔을 받아 들었다. 그는 원래 말수가 적었지만, 이런 가벼운 농담 정도는 던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주인장과 안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하루를 정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단순한 대화 속에서도 작은 위로가 있었다.


“그런데 낯선 손님이네요?” 박지윤이 조용히 눈길을 돌려 구석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낯선 남자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처음 와봤습니다.”


지윤은 살짝 머리를 기울이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직감적으로 그는 평범한 손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이곳에 오셨나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냥… 오랜만에 서울에 돌아와서요. 한동안 바빠서 이 동네를 잊고 있었네요.”


그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여운이 묻어 있었다.


“반갑습니다.” 임관훈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곳은 참 좋은 곳이에요. 조용하고, 따뜻하고. 그리고…” 그는 주인장을 흘깃 보며 웃었다. “사장님이 꽤 괜찮은 분이죠.”


주인장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다시 잔을 닦았다.


“말은 잘하시네요. 전 그저 손님들이 편히 쉬다 가는 곳을 만들 뿐입니다.”


최용찬은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조용히 덧붙였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가 있죠. 아마도 당신도 그런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낯선 남자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를 둘러싼 단골들의 분위기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편안했다. 계동리에서는 누구든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작은 대화들이 이어졌고, 그 속에서 주인장과 손님들은 서로를 조금씩 이해해 갔다.


계동리의 밤은, 때때로 지나간 시간과 새로운 인연이 조우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 문은 조용히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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