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의 창고
얼마 전, 조카들의 대화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됐다.
’ 내가 읽어야 할 책은 무한대야!‘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첫째 조카와
초등학교 1학년이 되는 둘째 조카.
방학 동안 오전에는 신나게 놀고,
오후에는 책을 읽는 시간을 가지는 게 이들의 일과였다.
그런데 이날, 둘째가 유난히 짜증을 내고 있었다.
“나 오늘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
끝이 없어! 무한대야, 완전!!!”
첫째가 고개를 젓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읽어야 할 책의 범위는 무한대가 아니야.”
하지만 둘째는 질세라 소리쳤다.
“무한대야! 진짜로!”
첫째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무한대는 셀 수 없어서 수가 아니야.”
둘째는 억울한 얼굴로 반박했다.
“아니야! 무한대도 수야!”
첫째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론을 내렸다.
“삼촌한테 물어보자!”
그제야 두 녀석이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대답했다.
“수가 아니야.”
첫째는 승리한 얼굴로 둘째를 쳐다보며 말했다.
“봐! 내가 맞지?”
둘째는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숫자처럼 생겼는데…”
그렇게 둘은 결론을 얻은 듯 각자 할 일을 하러 갔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 혼자 생각에 잠겼다.
대학에서 수와 컴퓨터를 전공했지만,
솔직히 말해, 무한대가 수가 아니라는 걸
그냥 외워서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조카들은
무한대가 ‘수인지 아닌지’를 자연스럽게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머릿속에서 수의 세계를 정리해 보기로 했다. 수는 ‘복소수(Complex Number)’라는 큰 개념 안에 있다. 복소수는 다시 ‘실수(Real Number)’와 ‘허수(Imaginary Number)’로 나뉜다. 실수는 우리가 흔히 쓰는 숫자들이다.
1, 2, 3 같은 자연수도 실수고,
0이나 -1 같은 정수도 실수다.
소수점이 있는 3.14 같은 수도 실수고,
π나 2처럼 무한히 이어지는 수도 실수에 속한다.
반면, 허수는 실수로 표현할 수 없는 숫자다.
예를 들면, -1 같은 값은 실수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서 허수라고 부른다. 그럼 무한대는 어디에 속할까?
무한대는 실수에도, 허수에도 속하지 않는다.
무한대()는 숫자가 아니라 개념이기 때문이다.
100보다 1000이 크다고 말할 수 있지만,
무한대는 어떤 수와도 비교할 수 없다. 단순히 ’ 끝이없다 ‘는 것을 표현하는 기호일 뿐이다.
첫째 조카가 ‘무한대는 수가 아니다’라고 말한 걸 떠올렸다. 설마, 이걸 이해하고 한 말이었을까?
무한대라는 개념은 보통 중학교쯤 돼야 배우는 개념이다. 나는 이걸 시험을 위해 외웠을 뿐, 실제로 이해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첫째는 이미 자연스럽게 무한대가 수가 아니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냥 어렴풋이 이해한 게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동생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문득,
“이 아이가 어쩌면 나보다 더 빨리 수학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첫째는 평소에도 질문이 많았다.
게임을 하면서도 확률을 따지고,
길을 걸으며 대략적인 거리를 계산하려 하곤 했다.
그걸 그냥 “아이들이 원래 호기심이 많으니까”라고 넘겼는데, 오늘 대화를 듣고 보니, 이 아이는 정말 수학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혼자 흐뭇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역시 우리 조카, 천재 아니야?” 세상 모든 삼촌이 그렇듯,
나는 오늘도 고슴도치처럼 조카를 자랑하고 싶어졌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