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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Nov 15. 2015

관계, 소비하지 않겠다는 다짐

누군가와 '아는' 혹은 '친밀한' 관계가 된다는 것의 어려움과 위험성을 안다. 시작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휩쓸리지만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부과되는, 그 "관계 맺기"라는 것의 괴로움이 있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 '자기방어'가 심하냐고 묻기도 한다.


사람과의 관계는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


겉과 속이 같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것은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겉과 속이 다르게 대충 맺어지는 관계는 만들고 싶지 않다. 그것이 어쩌면 내가 세상 속에서, 혹은 나 자신의 나태함에 저항하는 방법일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친한 척 하는 것도, 친한 사람에게 그렇지 않은 것도, 사회생활에서 이해득실을 따져야 하는 관계에서 소위 '가족 같은 분위기'를 강요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며느리를 딸이라 생각하겠다는 사람, 사위를 아들이라 하겠다는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호칭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이유가 있다. 사람을 대체하겠다는 생각이 생활 속 은연중에 퍼져있는 분위기를 나는 경계한다. 며느리가 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위를 아들이라 생각하겠다는 순간 우리의 관계는 딸도 며느리도 사위도 아들도 모두 잃어버린다.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돌아올 오해나 미움 따위는 당연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친밀한 관계에서 엇갈릴 수 있는 마음의 교류도 인정하는 것, 이런 것들이 관계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매일 깨닫는다. 이해득실을 따져야 하는 관계에서는 딱 그만큼의 관계 유지만 되면 된다. 대신 상대가 오해하지 않게 행동하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했다. '내가 당신을 통해 챙겨야 할 것들이 있어 만나는 것이니, 당신도 나를 통해 챙길 것이 있으면 챙기라.'라는 뉘앙스는 그래서 중요하다. 나는 이것이 관계의 정직함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에게서 많은 것을 챙기기 위해 마치 나의 모든 것들을 줄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은 비열하다.


사람은 소비되어서는 안된다.


거의 모든 것이 돈으로 대체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천만다행인 것은 가장 소중한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돈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의 중요함을 모두가 알고 있는 이유는, 우리 삶에 온기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돈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의 가장 중심에 나는 '사람'이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미덕은 자본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소비하는 것이다. 자본을 소비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된 세상에서 물론 모두에게 '자유'는 없다. 그러나, 소비하지 않을 자유는 있다. 자본을 모두가 가지지는 않았기에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면 그 곳은 아마 자본주의가 들어올 수 없는 그 틈새일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사람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사람 이하도 사람 이상도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먹지 않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물건으로 쓰지 않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디엔가 고용되어 거대한 기업의 자그마한 성냥 한 개비처럼 삶이 저당 잡혀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자본에 고용된 것이지, 사람에 고용된 것이 아니다.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사람의 직함이 그 사람의 가치는 아니라는 점이다.(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으로 착각한다.) 직함은 자본에 이미 종속되었다. 사람이 자본에 종속되지 않는 방법은 일터에서 입는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었을 때에 타인이 나의 직업을 알아채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모든 사람은 존엄하나, 모든 사람의 격이 같지는 않다.


세상에 저항하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사실 저항하고 혁명하는 일만이 나는 세상에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저항하고 혁명하는 일은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일을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혁명을 하며 산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방향이나 목적은 결국 나 자신으로 이르는 길이 아닐까. 결국에는 말이다. 수많은 것들을 지니고 살지만, 우리의 삶은 원래 그랬듯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여정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옆에서 걷고 있고, 앞에서 걷고 있고, 나를 뒤따르는 수많은 여행자로서의 사람은 모두 귀하다. 각자의 가치로서 의미 있고, 모두가 온기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에는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하게 화장된 얼굴을 가졌을 때가 아니라 메마르고 거친 얼굴을 가지고도 누군가에게 손 한번 내밀 때이므로.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사람에 대한 '긍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격이 같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그 자체의 사람으로 존중할 수 있는 능력, 돈의 표피에서 사람을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은 모두가 가지고 있지는 않다. 나로서 나의 삶이 향기로워질 수도 있지만, 나로서 타인의 삶에 악취가 되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을 모두가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관계에서 나는 그리하여 언제나 망설인다. 나의 간사한 머리가 누군가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산'하면 안 되는 순간에 나도 모르게 계산기를 꺼내 든 것은 아닐까. 돌이켜 무의식 중에라도 그렇게 이용하고 소비한 관계는 얼마나 될는지 생각해보면 제법 머리가 아찔해진다. 누군가의 말대로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말은 제법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많은 부분에서 사람은 생각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자본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단순히 당신이 돈과 교환되지 않기 위해, 내가 나로서의 가치를 가지기 위해, 매 순간 많은 공간에서 나를 다잡아가고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는 없지만, 돈 때문에 사랑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허다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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