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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Mar 28. 2016

마음의 노화

한 7년간은 지속된 것 같다. 거의 매달 시립교향악단의 공연에 거의 혼자 보러 갔다. 물론 한 번도 안 빠진 것은 아니었다. 약속이 생기거나 퇴근이 늦어지면 못 갈 때도 있긴 했다. (어느 해에는 아예 못 갔던 적도 있긴 했다. 번번이 공연 날에 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 우연도 쉽지 않다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별 일이 없으면 버릇처럼 예술회관에 시립교향악단의 공연에 가는 일이 일상이었다. 사실, 이건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에 주위에 클래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없으면 누군가와 같이 가기가 어려운 자리이다. 내가 클래식을 듣게 된 것은 가족 구성원의 영향이 아니었으므로(가족들 중에 클래식 애호가가 없으므로), 그리고 주위 친구들이나 지인들의 영향도 그다지 아니었으므로 어쩌면 그들의 입장에서 나는 예외적인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거의 혼자 간 일이 많다. 이렇게 시립교향악단 공연에 가게 된 것이 이만큼이나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긴 하다.

언젠가 이렇게 버릇처럼 공연에 가는 나를 보며,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 그 열정이 대단하다."

그 열정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냥, 가고 싶으니까 가는 거지. 누구든지 그냥 하고 싶은 일이 있듯이. 별로 대단한 일도 엄청 놀랄만한 일도 아닌, 그저 일상일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하면 되죠!"라고 말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그게, 마음만큼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단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줄어드는 것 같아. 나이 든 노인들의 키가 줄어들듯이."

나는, 이 대답을 듣고도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이 들어감을 느낄 때가 있다. 감기를 잘 앓지 않고 자란 체질이었음에도 2주 넘게 감기를 앓고 있는 나를 보면서. 야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았던 언젠가와 다르게 야식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나를 보면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면 밤 12시도 되지 않아 졸음이 쏟아져 견딜 수 없는 나를 보면서. 자연의 순리대로 내 몸은 시간을 지나가고 있다. 어딘가 모르게 퇴화되어 가고 있을 내 신체의 일부분을 보며 가끔 새삼 시간의 진행에 놀랍기도 하다. 벌써 나는 삼십 년이 넘게 이 몸뚱이로 버티고 있고, 이 몸은 삼십 년 넘게 한 번도 심장박동을 멈춘 적이 없다. 실로 대단한 생명이라는 경탄이 들 때도 있다. '나'라는 몸 자체를 객체로 멀리 떨구어놓고 바라보면 참으로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때로 있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변화의 과정과 맞물려있다는 생각만 하기로 한다. 그로서 얻어지는 부정적인 감상은 모두 주입된 것일 테다, 이렇게 또 주먹을 쥐어보기도 한다. 생의 투쟁은 곳곳에서 일어난다. 부정적인 감상의 주입에서 나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투쟁적인지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마음의 노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직감하면서 나는 우울해졌다. 신체의 변화도 때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마음이 늙어간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괜스레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울고 싶어 진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시립교향악단 공연을 예매하는 일이 귀찮아졌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궁금한 것들을 찾아보는 일이 재미없어졌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사진 찍는 일도 무언가 뻔해 보인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집에 누워있는 게 외출하는 것보다 편하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어떤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별로 생기지를 않는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여행 가는 일이 조금은 귀찮아졌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 마음의 근육이 단단할 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감정이 미지근해진다'는 것의 잔혹함을 깨닫고 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어지는 상황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받고 싶은 선물도 없다. 사야 하는 것들만 남아 있다. 생활에 감정이 묻히고, 생존만을 위한 최소한의 몸뚱이로 체제 변화를 일으키는 걸까. 최소한의 것들로 겨우 살아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 돈도 벌고 있는데, 삶은 풍요로워지기보다 외로워지는 쪽으로 흘러가는 모양새다. 어쩌면 이것도 신체적인 노화의 징후일까.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젊음의 정점을 찍고 지나가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는, 무얼 하든 예전보다 '용기'라는 것이 한 스푼 이상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필요한 용기의 양은 자꾸만 늘어날 것이다.(사실 이 글을 읽고 있을, 40대 이후의 분들은 나의 이 가소로운 글에 웃음이 나실지도 모르겠다.) 

나는 결혼이라는 것을 사회적으로 정해놓은(?) 연령대에 비해 그리 일찍 한 편이 아니다. 적어도 내 주위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나의 남편은 또래의 남자들에 비해 결혼이 많이 늦은 편이었다. 우리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기까지 내가 했던 생각 중 하나는, '너무 피곤하다.'였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에너지의 소모' - 이것이 그때의 내 생각이었다. 연애와 사랑의 과정에 무언가 모르게 '퍼포먼스'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오해가 적어지고 무언가 모를 편안함과 상대를 존중하는 부분에 조금 더 익숙하게 해 나가는 느낌은 분명 있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과정과 방법에서 드는 '수고로움'같은 것들(억지스러운 면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 신경 써주고 싶은 부분들)이 제법 고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이제야 나는 알았다, 연애에 에너지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상대로 인해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혹은 오해로 인해 생기는 잡음들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예전에 연애할 때에는 이런 고됨을 느끼지는 못했던 듯 싶었다. 그저 괴롭고 힘들고 우울할 뿐. 그 감정으로 생기는 2차적인 또 다른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괴롭고 힘들고 우울할 시간도 모자랐으므로.


사람을 좋아하는 일뿐만이 아니라 삶의 많은 부분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기 위해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제법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어떠한 열정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이 이런 것이구나.'를 깨닫게 된다.


삼십 대 중반이 넘어가는 지금에, 다짐한다. 아니, 이건 발악이다. 마음은 늙지 않고 싶다고.

늙는다는 것은 생각하는 힘줄이 느슨해진다는 뜻일까 봐 더욱 걱정된다. 단정하게 생각하고 싶으나 단단해지는 것만 같아 걱정된다. 삶의 끝이 내일이 되더라도, 오늘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생의 의욕을 놓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이것 때문일 것이라 생각해 본다. 죽음마저도 삶의 일부분으로 당당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도, 비열한 모습으로 돌아서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뱉어놓은 말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음의 근육이 줄어들지 않게 운동해야 하겠다 생각한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용기 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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