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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Nov 10. 2017

벨베데레:<유디트>를 만나고 싶어.

나는 사실 김영하라는 작가에 대해서 그다지 큰 호기심이 없었어요. 제목이 뭐였더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래. 그거. 그 작품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제목이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어. 최근에야 자기가 김영하에 제법 오랫동안 빠져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한번 읽어봤는데, 젊은 날의 자기가 어떤 고민에 빠져 있었는지, 어떤 분위기의 사람이었을지, 대충 짐작이 되기도 해요.

난 지금도 김영하의 작품은 습관처럼 다 사서 읽어.

그래서 저번에도 주문했어?

네.

그건 다 읽은 거예요?

택배가 온 그 날 다 읽었어요.

어때요?

내게는 여전해요, 작품은. 이제는 처음 김영하를 읽을 때만큼의 내 감수성이 떨어져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영하 작가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1996년에 출판했다. 벌써 20년이 되어가는 저 작품은 김영하가 젊은 시절에 내놓은 작품이다. 삼십 대 중반의 지금의 내가 읽어보기에는 너무도 감각적이고, 지적 허영도 얼핏 보이는 그 작품이라는 생각이 되었다. 사실은 작가에게 지적인 허영심이 있었다기보다, 내게 그런 면이 있었기에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여하튼 나는 집중한 채 빠른 속도로 책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는데 주제는 참신했고,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제법 긴장감 있어 그랬던 것 같다. 또한 김영하 작가의 필력도 좋았다고 생각이 되어서 나는 잘 쓰인 작품이라는 생각 했다. 나는 그 소설을 읽기 전까지도 클림트의 작품인 <유디트>에 대해 큰 감흥을 가지고 본 적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되려 김영하의 저 작품 덕분에 나는 유디트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달까.


궁이라고 하기보다는 미술관을 찾아 그림을 볼 생각으로 갔던 곳이었다. 벨베데레 궁전은 말이다. 이미 미술관으로 쓰고 있기도 하고.


하궁(下宮)과 상궁(上宮)을 다 봐야 하는 거야?

상궁만 갈까?

클림트의 <키스> 그림은 상궁에 있대.

난 <유디트>가 더 보고 싶어. 상궁 거기에 <유디트>도 있어?

응. 그럼 상궁만 가자.

벨베데레 궁전의 전경. 프랑스식 정원이 돋보인다.

 벨베데레를 가는 목적은 누구나 그렇듯이 그림이기에 우리도 그림을 보러 갔다. 상궁만 가기로 했으나 결국 하궁까지 가게 된 것은 남부럽지 않은 호기심 때문이겠다. 뙤약볕에 푸른 하늘, 전형적인 여름 날씨를 보여주는 어느 날의 벨베데레에는 여행객들이 많았다. 모두 클림트의 그림을 보러 온 듯했다.

클림트의 그림을 보기 전, 연회장으로 쓰였다는 상궁을 둘러보았다. 높은 천장과 화려한 벽화에 천장화 등과 조각품은 멋스러웠다. 우리는 전시실로 들어가기전 여름 궁으로 쓰였다는 이 전망 좋은 궁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우리가 익히 몬 적이 있는 나폴레옹 그림도 걸려 있고. 화려한 궁 안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옛 영광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클림트의 그림이 걸려있는 방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궁궐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은 느껴지기 힘들 정도로 황금빛의 강렬한 클림트의 그림이 아우라를 뽐내고 있었다. 새삼 감회가 남달랐다. 사람들은 셔터를 연신 눌러댔고, 우리도 그 틈바구니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며 셔터를 눌렀다. 그림은 그림 자체가 가져오는 감흥이라는 것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을수록 생각보다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대작 앞에서 느껴지는 위대함을 가지기에 주위는 너무도 소란했다. 대단한 그림에 걸맞은 여행객의 숫자겠다.





작은 액자 속에 담긴 그림 한 점이 큰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 있었다. <키스>의 정 반대편에 말이다. 우리는 눈빛으로 알았다. 저기에 있구나, 유디트. 빠른 걸음으로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이는 작품 <유디트> 앞으로 갔다. 우리는 클림트의 <유디트> 앞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아직 정사情事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의 몽환적이고도 나른해 보이는 유디트의 표정은 가히 압권이었다. 약간은 상기된 얼굴 아래에는 베어진 홀로페르네스의 머리가 유디트의 손에 들려있다.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고 이스라엘을 지켜내려고 했던 유디트는 이후에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주제가 되었다. 많은 작품들이 그려낸 '성녀聖女'로서의 유디트가 아닌 에로티시즘을 보여주는 유디트의 모습은 이전 시대의 미술에 대한 반항이자 엄청난 일탈이기도 했다. 그림을 실제로 보며 나는 김영하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 유디트를 닮았다는 - '세연'이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작가가 클림트의 유디트를 모티브로 소설을 썼다는 것에 대해서도 한 번 더 곱씹게 되었다. 어쩌면 작가 김영하는 제대로 된 일탈을 소설에서 보여주게 되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스쳤다.(실제로 당시 그 작품은 제법 큰 반향을 불러왔던 소설이었다)


소설도 작품이고 예술이다. 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예술은 예술을 통해 또 한 번 드러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상호 간에 주고받는 그 큰 영감이라는 것은 실로 위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우리의 여행과 삶에도 어떤 영감이 있었으리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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