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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Oct 19. 2017

비엔나의 음식:자유여행자의 끼니

슈타츠오퍼(비엔나 국립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아침을 먹는 날이 오다니!


이미 기적이었다. 비엔나에서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도 꿈만 같은 일이건만 아침을 슈타츠오퍼를 바라보며 먹을 수 있다니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일 이 일들이, 여행자에게는 그토록 희귀한 순간이다. 우리에게 비엔나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명사였으므로. 빌리 조엘의 "Vienna"라는 노래를 들으며 비엔나에서의 마지막 밤에 잠이 들 때에도 이것보다 좋은 느낌이지는 않았다. 

음식은 감각을 가장 빨리 깨우는 직접적 행동 아닌가. 생리적 활동인 동시에 심리적 활동, 그리고 가장 본능적 활동. 그 본능에 충실한 상황에서 비엔나라는 것은 실로 멋지지 않은가 말이다.


길 건너편에 바로 우뚝 서 있는 슈타츠오퍼를 바라보며 야외 테이블에서 단출하게 크로와상과 애플파이를 하나씩 놓고 매장에서 직접 구운 쿠키를 곁들여 카푸치노를 마셨다. 간단하고 저렴한 1인당 5유로 남짓의 식사였지만, 나는 이 순간에 비엔나의 공기를 처음으로 삼켜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드디어 비엔나에 왔음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이날의 카푸치노 맛이 유명하다고 하는 카페에서 마신 커피보다도 내게는 더 좋았다. 



쇤부른궁으로 들어가기 전에 표를 끊는 일만 1시간이 걸렸다. 그렇게나 관광객이 많을 줄은 몰랐던 우리는 배고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원래는 쇤부른을 구경하고 궁을 바라보며 식사를 하는 것을 계획으로 잡았지만, 표를 끊으며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매표소 앞 작은 카페테리어에서 요기를 했다. 나는 브레첼(Brezel)을 주문했다. 음료는 그냥 물이었고. 짭조름한 소금이 군데군데 박혀있는 심심한 맛의 빵은 생각보다 먹기 좋았다. 버터도, 크림도 별로 당기지 않는 날에 나는 브레첼을 제법 즐겨 먹었다. 표를 끊고 한숨 돌리며 쇤부른에 대한 설명서를 읽고, 밀린 일정을 기점으로 다시금 스케줄을 조정하며 이 시간을 즐겼다.


어느 날은 정말 멋진 브런치를 먹었다. 비엔나에는 수많은 유명한 카페들이 있다. 비엔나에서 카페 투어를 하는 여행자들도 많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카페들을 지나가는 것으로 만족했고, 길게 줄을 서는 것도 일부러 카페를 찾는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고 싶었던 곳은 꼭 한 군데 있었으니, 클림트와 에곤 쉴레가 만난 곳. 그리고 여러 예술가들이 영감을 주고받으며 대화했을 그곳. <카페 뮤제움>이었다. 건물도 로스 하우스를 지었던 "아돌프 로스"가 지었던,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고 오브제가 되어 있는 그곳 말이다. 위치도 환상적이지 않나.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를 등지고 있으며 빈 대학이 멀지 않은 곳에, 제체시온(분리파 전시관)도 근처에, 뮤지크 페라인(비엔나 필하모닉 공연장)도 옆에 위치하고 있다. 야외에 앉아 메뉴를 본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비너 멜랑주(Wiener Melange)와 애플파이를 주문했는데, 이건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멜랑주의 거품은 매우 부드러웠고, 아펠스 트루델(Apfelstrudel)이라고 하는 패스츄리 스타일의 애플파이는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향과 맛이다. 정말이지, 오스트리아에서 먹었던 흔한 음식 중에 타 지역에서 맛볼 수 없는 단연 최고의 맛이라 말하고 싶을 정도. 그리고 그는 블루베리 케이크와 아인 슈페너를 함께 주문했다. 달콤한 오후가 부드러운 거품처럼 넘어가는 매우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아무 말 없이 우리는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영영 비엔나에 머물것 처럼 행동했다.


유럽에서 기대했던 맥주들은 의외로 우리 입맛에는 특별하지 않았다. 평소 수제 맥주나 브루어리를 가진 가게의 생맥주를 즐겨 먹는 편이라 맥주에 대한 나름의 입맛(?)을 가지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소문난 브루어리의 맥주들은 큰 차이 없었고 특별할 것도 없었다. 맛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겠다. 그런데도 이 집을 우연히 발견하여 들어갔는데, 이후에 비엔나에 머무는 동안 이 곳을 두 번이나 찾았다. 요리도 가격에 비해 매우 훌륭했고, 수제 맥주는 종류별로 다 마셔보았는데(!), 모두 훌륭했다. 특히나 립 요리는 푸짐한 양에 둘이서 다 먹기도 벅찰 만큼 양이 많았다. 함께 곁들여지는 감자튀김은 신선하고 기름지지 않아 좋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19세기 비엔나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에 제법 취한 것도 이 집에서 술을 마신 날이었다. 다음날의 컨디션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술과 음식에 취한 저녁의 풍경은 이 여행 전체를 통틀어 계속 생각이 날 정도로 괜찮은 식당이었다. 어쩌면 이 집이 정말 맛이 있었다기보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이 이 집에서 특히나 더욱 즐거워서였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든 우리에게는 여행 중 가장 최고의 식당이었다.



사실 내가 다닌 동유럽 몇몇 나라의 식사는, 대체로 실망스러운 편이었다.

멋진 레스토랑에서 잘 차려진 정찬을 먹어보지 않고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리인 줄은 알지만 말이다. 아니 그렇다면 더 실망스럽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정찬이 아니면 대충 먹어도 된다는 뜻은 아닐 텐데 말이다. 실망스럽다는 뜻은 그들의 음식이 별로라기보다, 내가 한국인임을 확실하게 인지하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까. 특히 오스트리아는 바다를 가지지 못한 나라여서 그런지, 식재료가 너무 단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상대적으로 우리의 식문화가 얼마나 방대하고 다양한지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친구 한 명은 유럽 여행을 다녀오고서 "내 평생 먹을 감자를 2주간 거기서 다 먹은 것 같은 느낌이야."라고 말했으니 말이다. 우리가 매 끼니에 쌀(밥)이 빠지지 않듯, 유럽인들의 식사에는 매 끼니에 감자가 빠지지 않는 것 같다. 굽든, 찌든, 튀기든 어떻게든 감자는 꼭 끼어든다. 감자는 우리에겐 구황작물(!) 일뿐이다 사실은. 그래서 고급한 식재료도 아니고, 흉작이 들었을 때 대체음식으로 먹었던 식재료라는 인식이 아직도 강해서 그런지 예전에 엄마가 유럽을 다녀왔을 때에는 그렇게 잘 사는 유럽이 왜 감자만 먹는지 모르겠다고 눙을 치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이미 서구의 식재료와 조리법이 대중화되어 그런지, 혹은 서구의 입맛에 많이 길들여져서 그럴까. 그 나라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메뉴의 음식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여행지에서의 식사는 언제나 우리에게 추억으로 각인시킨다. 왜냐하면 자유여행자의 식사란 들쑥날쑥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식사마저도 여행지에서 만나는 유적이나 기념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자유여행에서의 식사는 패키지여행처럼 정해진 식사메뉴와 시간이 정해져 있지도 않고, 계획했던대로 모두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식사조차도 진정한 여행의 일부가 된다. 남들이 먹어보지 못한 것들을 먹기도 하지만, 유명하다는 음식들을 못먹기도 한다. 그렇기에 음식마저도 돌발상황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다행히 우리는 음식에 그다지 많은 관심을 가지는 여행자는 아니다. 맛집 투어를 평소에 즐기는 편도 아니고, 음식 자체에 대한 감동보다는 그 순간과 분위기에 더욱 도취되는 편이랄까. 그래서 무심결에 들어갔던 어느 공간에서 더없이 많은 감흥을 받았던 적이 많다. 이번 여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음식들을 생각하면 비엔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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