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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베짱이 Dec 12. 2022

늪에 빠진 [누비라 2]

자동차 대마왕(6)

까망이 [르망 레이서]와 함께 <진해>로 내려온 나는 <부산>의 한 조선회사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내가 승선할 함선은 현재 건조 중이며, 그곳에서 건조가 끝나면 인수를 하여 <진해>로 다시 입항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산> OO조선소로 향했고, 그곳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부사관 중사를 만났다. 그 중사는 군복을 착용하지 않고 사복 차림이었는데 나를 작은 사무실로 안내하더니 현재 건조 중인 함선의 상태와 우리의 임무를 브리핑하였다.

임무 내용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했는데, 한국 해군의 최초 반잠수정 모함으로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우리는 사전 침투조가 된다는 것이었다. 더 자세한 사항은 혹시 모를 비밀 유지(?)를 위해 구체적으로 풀지 못함을 양해 바란다.


아무튼 군복을 벗어던지고 사복 차림으로 <부산> OO조선소의 생활은 꽤나 길어졌다. 그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함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새로 창설하는 부대의 초기 매뉴얼을 만들어 내느라 심신은 지쳐가고 있었다. 중고차 '까망이'도 인천에서 이미 너무 오랫동안 바닷바람을 맞아서인지 처음의 펀치력을 잃고 조금씩 쇠약해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중위 2년 차에 들어선 나에겐 신선한 자극이 필요했다!


젊은 나에게 신선한 자극은 많았겠지만 그중 무엇보다 강렬한 자극은 결국, 신형 자동차를 입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레이싱을 펼치던 '까망이'를 보내고, 나는 처음으로 중고차가 아닌 새 차를 구매하기 위해 자동차 전시장으로 향했다. 광고로 보면서 선한 앞모습과 차분한 라인, 깔끔한 흰색이 정말 잘 어우러진 대우자동차의 [누비라]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누비라] 나에게 오던 날,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잠입하여 뜯지도 않은 비닐 위에 살포시 앉았더니 기분 좋은 새 차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천천히 키를 꽂고 돌리자 마치 주인을 알아본 백마가 앞다리를 치켜들며 환희의 콧소리를 내고는 얌전해지듯 부드러운 진동으로 나를 설레게 했다.


[누비라]는 이름과 생김새에서 스포츠 감성은 일도 묻어나지 않는 그냥 단정하고 차분한 세단 그 자체였다.

차가 바뀌니 내 운전 스타일도 많이 변해갔다. '까망이'를 탈 때면 그저 몰아붙여서 그 앙칼진 엔진음을 듣는 쾌감을 즐겼다면, [누비라]를 몰면서는 편안하고 안정적인 주행을 하면서 감미로운 음악을 듣고 싶은 조금은 클래식한 감성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까망이'이와 레이싱을 펼칠 때는 'Guns N' Roses'나 'Helloween'등의 헤비메탈이 어울렸다면, [누비라]와의 잔잔한 드라이브에서는 '015B' 나 '신해철' 'Queen'의 노래가 깔맞춤 되기 일쑤였다.



한 번은 휴가 중 대학 절친과 함께한 서해 대천 해수욕장에서 검푸른 바다 위로 빨간 물감을 덧칠하며 사라져 가는 경이로운 일몰의 풍광에 넋이 나가 [누비라]를 모래사장으로 슬슬 이끌었다. 모래사장 위 자동차들의 타이어 자국들이 선명하여 괜찮겠다 싶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창문을 열고 해안가를 달리다 중간 지점에 차를 세우고 잠시 음악과 바다에 도취되었다.

출출해진 우리는 모래사장을 나가기 위해 액셀을 밟는 순간 헛발질을 해대는 [누비라]의 뒤뚱거림을 느끼고는 큰일이 났음을 직감했다.

전륜구동인 [누비라]는 모래사장에 멈춘 동안 바퀴가 모래에 파묻혔는지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잃고는 두더지처럼 땅만 파헤치며 모래만 토해내고 있었다.

뒤에서 혼신을 다해 미는 친구와 내 발끝에서 전달되는 필사의 탈출 엑셀은 그저 [누비라]를 더 깊은 늪으로만 빠트리고 있었고, 점점 어두워지는 해안가 모래사장에 반사되는 빛들은 이제 하루를 마감하려는 듯 깜빡깜빡 졸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경운기 한대가 감독의 '액션!' 명령에 맞춰 움직이듯 우리를 향해 오고 있었는데, 뒤쪽 짐칸에는 4~5명의 젊은 청년들이 해안가에서 쓰는 밧줄이나 갈퀴, 삽자루 같은걸 매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앞에 멈추고는 신고를 받고 온 견인차 직원들처럼 일사불란하게 밧줄로 차와 경운기를 연결시키고, 몇몇은 모래사장에 빠진 바퀴 쪽 모래들을 퍼내더니 얼마 되지 않아 [누비라]를 구출해주었다. 진퇴양난의 늪에서 탈출시켜준 그분들이 너무 감사하여 우리는 해안가 앞쪽에 있는 횟집에서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뒤늦게 정신이 들어 처음부터 궁금했던 걸 묻자,


한 젊은 청년이 이렇게 대답했다.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저쪽 방파제 위에서 들어갈 때부터 바라보고 있었어요~껄껄껄~"


그 웃음의 의미가 곤경에 처한 여행객을 위한 선의였다는 것인지 아니면, 약간의 직업정신(?)이었다는 것인지는 애매모호했지만 우리는 같이 따라 웃었다.


[누비라]와의 동행은  자동차 인생에서 두 번째 긴 세월이었다. 그래 봤자 4년여 동안이었지만 그만큼 무난하고 질리지 않았던 차량이었던 것 같다. 해군 대위로 승급한 나는 특수함에서 내려 포항 해병대 1사단 ANGLICO중대(항공 함포지원중대)로 발령이 났다. 부산과 진해를 누비고 있던 나를 포항까지 보내는 걸로 보아 인사처에서 내가 타는 차량 이름이 [누비라]인걸 알았던지 싶다.

전역 1년 반을 남기고 마지막 인사명령은 부산 3함대 훈련관이었다.

그렇게 군생활의 반 이상을 남해지역에서 보내고, 나는 잊지 못할 2002년 한. 일 월드컵이 한창일 때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해군 대위로 전역을 명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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